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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들 궁시렁 궁시렁

바둑의 神 "이창호 9단" [ 한시대를 지배했던 전설의 기사 ] -2

by 멀리던 2020.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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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포스팅처럼. 이야기 풀이는 반말로 할게요~!!

 

 

 

 

 

 

 

 

 

 

자 그럼 바로 2편 시작한다!

 

 

 

 

 

 

이창호 九

 

 

지난 1편에서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던

조훈현은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여 함께 서울로 올라와

 

그때 당시 화곡동에 거주하던 조훈현은 이창호를 내제자로 들이게 되자

연희동의 넓은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돼

(참고로 왜 제자를 내제자라고 부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서 

설명해주자면 바둑을 배우기 위해 스승의 집에 머물며 

수학하는 제자를 바둑계에서는 내內제자라고 불러)

 

당시 조훈현은 노부모를 모시며 살고 있었는데

이창호는 2층의 노부모가 쓰는 방에서 함께 지내게 돼

이창호는 지금의 승부사다운 모습과는 다르게

어린시절부터 겁이 많았다고 해

특히 잘 때는 혼자서 잘 수 없어서

전주에 지낼 때도 늘 부모님과 함께 자거나 형과 잤다고 해

(이창호는 3남 중 둘째)

나중에 중학생이 되어 따로 방을 주었을 때도

항상 불을 켠 뒤 문까지 열어놓고 잠에 들었다고 해

 

이곳에서 이창호는 약 7년 간 지내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독립을 하게 되는데

조훈현의 아내인 정미화씨는

"7년동안 2층으로 올라가는 창호의 발소리가 

울리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

 

그 정도로 이창호는 작은 일에도 조심성이 투철했다는 거야

이는 이창호의 기풍에도 잘 나타나는데 

전투를 할 수 있는 힘은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항상 전투를 피하고

아무리 확실해 보이는 자리에도 손이 쉽게 나오는 법이 없어

그래서 이창호는 수읽기는 빠르지만 빠르게 두는 속기파였던 적은 한 번도 없어

수읽기는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했지만 늘 장고를 하는 스타일이었지

(하지만 1분 초읽기에 몰리면 빠르게도 정말 잘 둔다)

 

이창호에 대한 우스갯소리로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에 빗대어

'이창호는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돌아서 간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야

 

 

아무튼

첫 일년간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교대로 서울로 올라와 함께 지내며

머리도 감겨주고 외식도 시켜주고 했다고 해

앞서 말했지만 이창호는 혼자있으면 

정말 숨쉬는 것,바둑 두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못하거든

참 다행이었던 건 말도 잘 못했다는 점인데

네 살배기 아들과 갖 태어난 딸을 키우며 노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대국장에 데려갈 땐

운전수 역할도 도맡아 하는 게다가 이제는 남편의 제자까지 키워야 했던

정미화씨는 보채고 귀찮게 않는 과묵한 아이가 참 고맙게 여겨졌을 거야

 

조훈현은 언제나 바빴기 때문에

이창호는 학교에 다녀오면 혼자 연습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어

보통 조훈현이 사활문제(맥점에 착수하여 바둑돌을 살리는 문제)

같은 숙제를 내주고 대국 때문에 외출을 하면

이창호는 스승이 돌아오기 전까지 문제를 다 풀어놓고 하는 식이었어

 

어찌 보면 참 외로웠을 것 같아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테니까 말이야

더구나 매일매일 같은 패턴의 나날들이 반복된다면

아무리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바둑도 과연 언제까지 즐거울 수 있을까

이창호의 어린 시절 사진들을 보면 보통 웃고 있는 사진을 찾아보기 힘들어

 

 

 

외모 ㅍㅌㅊ?

 

 

하지만 그렇다고 이창호가 웃을 줄 모르는 것은 아니야

이창호가 처음 참가했던 어린이바둑대회에서 16강에서 패배를 하고

충격을 받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승부욕이 누구보다 뛰어나며 지기 싫어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라고 생각해

이창호는 아마도 감정을 잘 못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잘 숨기는 아이가 아니었을까 싶어

감정 표현이 서투를 뿐이라는 거지

 

바둑기사로서 감정을 잘 숨긴다는 것은 최고의 재능 중 하나야

반상을 두고 마주보는 상대에게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건 약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니까

어디까지나 이건 이창호에 대해

연구하며 여러 정황을 통해 내려본 나의 추측이지만

 

어쨌든 한 명의 꼬마 아이가 감당해내기 힘든 생활이었음에는 틀림없어

하지만 소년 이창호는 

이러한 고독한 싸움을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둑공부에 매진하고 스승이 내주는 

숙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고 말아

그리고 스승이 잠든 후에도 밤 늦게 까지 기보(대국의 수순)를 보며

바둑알 놓는 소리에 조훈현의 부인은 자주 놀랐다고 하지

 

누구보다 성실했던 이창호가 가끔 스승에게

혼이 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건 이창호가 가끔 복기를 틀리는 일이 있어서 였어

 

복기란 마무리가 된 대국의 수순을 거슬러 올라가며 

패인을 찾아내거나 묘수를 찾아내는 일을 말하는데

일단 복기의 핵심은 대국의 수순을 전부 외우는 거야

그런데 이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보통 아마추어들도 어느정도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면 다 할 수 있는 일이거든

몇 백수나 되는 수순을 어떻게 다 외우냐 하겠지만

 

바둑은 한 수를 두고 다음 수가 어느정도에 올지 감이 오기 때문에

모든 수가 연결되어있고 그런 감이 생긴 후에는 수순이 금방 외워져

더군다나 프로를 준비하는 바둑 신동이라는 놈이 복기를 틀려서는 안되는 것이었지

그런데 이창호는 이런 기본적인 부분을 틀려서

스승의 핀잔을 샀어

스승 조훈현은 어려서부터 절대 그런 실수는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거든

 

"멀꼬라봐...!!"

 

 

스승 조훈현이 더 화가 났던건

다른 부분은 또 엄청나게 뛰어난데 이런 말도안되는 실수를 했기 때문이야

스승의 입장에서는 제자가 나태하다고 보기 좋은 실수였지

 

하지만 내 생각엔 이창호는 조훈현을 겁내고 있었던 것 같아

자신이 동경하는 바둑, 그것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스승 조훈현이었으니까

이렇게 이창호는 고독하고 혹독하게 훈련을 거듭해

 

84년도 4월에 서울에 올라온 이창호는 그해 11월 프로입단대회에 나가는데

결과는 보기좋게 탈락

서울에 올라와서 줄곧 열심히 바둑공부를 했고

전주에서부터 바둑공부는 쉬지 않았지만 역시 프로의 벽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어

 

이창호의 탈락소식은 한국기원에서도

큰 이슈였지

이창호는 조훈현의 내제자 였으니까

 

프로기사들 중에는 조훈현과 사이가 좋지않은 기사들이 많았어

그건 조훈현이 대국매너가 좋지 않았던 것도 있고

(담배를 너무 많이 태운다던가 혼잣말을 해서 시끄럽게 한다던가

바둑알을 한웅큼 쥐고 짤그락 댄다던가 하는 안좋은 습관이 많아)

너무 오랫동안 혼자서 타이틀을 죄다 독식해서 그런지

주위에서 조훈현을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어

 

조훈현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프로기사들은 조훈현이 들으라는듯이

'바둑신동이라더니 별거 아니네'

'눈도 멍하고 뚱뚱해서 바둑을 잘 둘 관상이 아니야'

라며 기다렸다는듯 

스승의 심기를 긁는 소리를 해대지

 

하지만 그때 이창호의 나이는 겨우 열살 

만으로 아홉살이었다

조훈현 외에 만 아홉살에 프로가 된 사람은 현재까지도 없으니

이창호가 절대 늦은 것은 아니었어

 

하지만 많은 이들이 조훈현의 제자 이창호를 깎아내리기 바빴을 때

서봉수 9단 만은 라이벌의 제자를 두고 다른 평가를 내렸다고 해

참 의외지 서봉수 9단은 조훈현 9단과 사이가 안좋은 수준이 아니라

서로 원수지간이니까

 

서봉수 9단

 

그럼에도 서봉수 9단은 이창호를 향해

"저 친구 올해 아홉살이라고 했나? 바둑 두는거 보니 

끝내기에서 한집 버는 솜씨가 아주 기가막히네 기가막혀 허허. 대단한 재주야!"

라는 평가를 했다고 해

 

아무튼 비범한 사람들은 보는 눈이 다르긴 다른가보네

사실 전성기 시절 이창호는 완벽 그 자체였지만 그중에서도

끝내기를 가장 잘하는 기사였으니까

서봉수는 벌써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어

 

그러다 드디어 2년 후인 86년도 8월에

만 11세의 나이로 당당히 프로입단을 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조훈현의 다음으로 빠른 기록이었다

이창호는 기쁘기도 기뻤지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을 거야

주위에서는 조훈현의 제자라는 이유로 색안경부터 끼고 봤으니까

이창호는 프로입단을 결정짓자마자 전주로 내려가

 

어린 시절부터 둘째 손주 이창호를 끔찍이도 아꼈던 할아버지가

얼마 전 폐암판정을 받고 집에서 요양중이었거든

할아버지는 어린 창호가 프로기사가 되었다는 말에

폐암으로 몸저 누워있으면서도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그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는 이창호의 말이 기억이 나

이창호의 할아버지는 그해 10월 폐암수술을 받고 11월에 돌아가셨어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서울에서 프로 생활을 하고 있던 창호를 꼭 세계제일로 만들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잘하라는 유언을 가족들에게 남겼다고 해

 

사실 어떻게 보면

이창호의 할아버지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이창호가 없을지도 몰라

처음 이창호에게 바둑을 알려준 것도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창호가 좋아하는 바둑을 할 수 있게 한 것도

모두 할아버지의 선택 덕분이었으니까

 

프로가 된 후에 이창호는 충암국민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는데 이건 충암고에 있던 바둑연구실 때문이었다

충암고는 재단 차원에서 당시 바둑연구실을 두어 학교에 다니는 프로기사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고 대회와 학업을 병행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해주었기 때문인데

당시에 충암바둑연구실에는 충암고를 졸업한 유창혁이 있었어

유창혁은 이창호보다 9살이 많은데 

집안 사정이 좋지못해 3년 간 바둑을 쉴 수 밖에 없었고

84년도 18살의 나이에 프로입단을 하게 되지

유창혁의 실력을 감안하면 꽤 늦은 입단이라고 밖에 볼 수 없어

 

 

유창혁9단

이경규 닮았네요..?

 

잠시 유창혁 9단에 대해 설명하자면

유창혁 9단은 후에 조훈현, 서봉수에 이어

제 3회 응씨배를 우승하게 되는 

한국 바둑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야

현역시절 최강공격수,일지매등의 별명으로 불리며

날카로운 공격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시원시원한 기풍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던 기사야

오히려 이창호의 기풍을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유창혁의 기풍을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었지

시종일관 공격하는 그의 기풍은 바둑 보는 재미를 쏠쏠하게 해주었으니까

비록 이창호와 동시대에 활약했기 때문에 우승횟수는 이창호에 비해 훨씬 적지만

93년도 후지쯔배, 96년도 응씨배, 2000년 삼성화재배, 2001년 춘란배, 2002년 LG배를 우승

세계 주요 5대기전에서 모두 우승하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 등

이창호 못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어

지금도 프로기사 활동과 바둑 해설로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며

현재 바둑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있어

 

어쨌든 이창호가 충암초등학교로 전학을 가며

둘은 처음 만나게 되었고

어려서 부터 유복하게 자라온 엘리트 이창호와

집안형편 때문에 바둑의 꿈을 접을 수도 있었던 늦깎이 유창혁의 만남은

어찌보면 운명적인 만남이라고도 볼 수 있어

이렇게 대조적인 인물이 앞으로 우승을 다투며 

한국 바둑계를 이끌어가게 되니까 말이야

 

(좌) 이창호 9단 (우) 유창혁 9단

 

이 사진은 전에 열렸던 '한국바둑의 전설'이라는 이벤트성 대회인데

조훈현,서봉수,조치훈,유창혁,이창호

당대 최고의 바둑 고수들이 모여 대결을 했던 대회였어

사실 이세돌을 제외하고는 저 다섯명의 팬이 

현재 바둑팬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아무튼 이 대회에서 최종우승은 유창혁이 하게 되는데

적지 않은 나이에도 여전히 녹슬지 않는 실력을 보여주지

참고로 유창혁은 올해 나이가 쉰이야

 

 

 

 아무튼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창호는 프로가 된 첫 해 86년도에 공식전적 7승3패를 기록하게 돼

승률 70%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어

하지만 이창호는 일곱번 이긴 대국보다

세 번 졌던 대국을 곱씹고 곱씹었어

 

 

그래도 커가면서 젖살이 조금씩 빠져가는 것 같다

 

프로가 된 후의 생활은 오히려 프로가 

되는 것 보다 훨씬 더 혹독했다고 해

이제는 진짜 프로들끼리의 싸움만이 남은 거니까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천하의 이창호도 별 수 없었던거지

 

매일밤 자신의 패배가 납득이 될 때까지 복기를 하다 잠이 들었다고 해

이때 나이가 만으로 열한살...열두살이면 국민학교 5학년이야

참 이창호도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운 프로기사들을 보면

죄다 어린아이 답지 않은 면이 있어

 

그렇게 2년이 지난 후 서울 올림픽이 있던

1988년

이창호는 처음으로 타이틀 전 결승전에 오르게 된다

결승전 상대는

최강의 스승 '조훈현'

 

 

1988년 24기 최고위전 결승전(운당여관)

 

 

사진속의 장소는 운당여관이라는 곳인데 

종로구에 위치한 오래된 여관이야

인간문화재 명창 박귀희 씨가 소유한 곳인데

58년도 부터 89년도 까지는 국수전을 비롯한 명인전,최고위전 등 

국내 주요 기전의 결승전을 이곳에서 진행했어

이곳은 바둑계에 있어 성역이었는데

89년도에 재개발로 건물이 헐려버리면서 더이상

이곳을 사용할 수 없었고 후에는 다른 장소에서 결승전들을 진행하게 되지

 

 

아무튼

생각보다 빨리 스승의 자리를 넘보았지만

결과는 3-1로 보기 좋게 이창호의 패배

 

조훈현은 아직 멀었다는듯 무자비하게 제자를 몰아붙였어

아마도 이 어린 핏덩이를 여기까지 올려놓은

중견기사들을 향한 무언의 압박이었을지도 몰라

아직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지

 

하지만 이창호는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인다

이때까지도 이창호도 자신이 아직 부족하다고 느꼈을 거야

조훈현이라는 존재는 이창호 뿐 아니라 다른 프로기사들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벽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창호는 스승에게 한 번의 승리를 거두며

조훈현도 결국은 이길 수 있는 상대라는 걸 느끼게 돼

 

그렇게 2년을 이창호는 또다시 묵묵히 칼을 갈게 된다

 

2년 뒤 1990년도... 

 

1990년 30기 최고위전 결승전

 

드디어 이창호는 종합전적 3대2로 스승 조훈현을 꺾고 

2년 전 빼앗지 못했던 최고위 타이틀을 빼앗아 온다

아직도 이창호는 바둑을 두며 가장 즐거웠던 순간을 꼽으라면

첫 세계 대회 동양증권배 우승도 농심 신라면배 역전 우승도 아닌

이 날의 최고위전 첫 우승을 꼽는다

 

이건 그동안 쌓아왔던 을분의 표출이었고 이창호가 보낸 수 년간의 

고독한 훈련이 톡톡한 성과를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며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소중한 우승이었다

 

 

 

 

그리고 이창호는 이 해에 국수(國手)전에서도 스승 조훈현을 꺾었다

앙 국수띠

 

 

스승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타이틀을 빼앗아 옴과 동시에

'국수(國手)'로서 '대한민국의 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90년대의 이창호는 그야말로 파죽지세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어보였다

그 옛날 조훈현이 김인,하찬석,윤기현,서봉수등을 꺾으며 그랬던 것 처럼...

한국 바둑계의 왕좌가 교체되는 순간이었다

 

그 후 1992년 동양증권배 우승으로 세계 최연소 타이틀획득기록을 시작으로

 

 

 

 

 

95년 TV바둑아시아대회 우승

 

96년 TV바둑아시아대회 2연패,후지쯔배,동양증권배,세계바둑최강전,삼성화재배 우승

 

97년 삼성화재배2연패,LG배 세계기왕전 우승

 

나가는 국내,국제대회 마다 우승을 휩쓸게 되고

 

조훈현은 이창호와 만나는 번번이 패배하며

타이틀을 모두 내주고 만다

 

 

 

 

2002년도에는 종전까지 스승 조훈현만이 달성했던 프로통산 1000승을 달성과

프로통산 타이틀 100회를 달성하며

더 이상 이창호의 앞에 적수가 없음을 재확인하게 돼

 

 

 

 

이제 스승을 넘어 세계최강의 반열에 오른 이창호...

 

그는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여기까지가 이창호의 성장기와 전성기의 시작을 다룬 2편이야

다음 3편에서는 이창호의 유명한 일화, 상하이대첩등의 활약상을 주로 다루며 마무리해보려고해

끝까지 다쓰려고했는데 사실 이 뒷부분이 내용이 더많아..ㅋㅋ 

 

재밌게 읽어줬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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