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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궁시렁 궁시렁

행주대첩 양군 라인업

by 멀리던 2022.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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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본군 라인업

 

우키다 히데이에(우희다수가)-히데요시의 사위. 행주대첩 당시 일본군 총대장. 도쿠가와랑 나란히 하던 오대로(五大老)  중 하나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임란 당시 일본 제 1군 대장이자 조선 원정군 선봉장. 행주 전투 전 평양성에서 이여송에게 밀려 패퇴한 상태였다.

 

 

 

 

 

 

구로다 나가마사(흑전장정)-군사 칸베에로 알려진 구로다 요시타카의 아들, 임란당시 일본군 3군 대장

 

 

 

 

 

 

 

이시다 미츠나리(석전삼성)-히데요시가 봉한 오봉행(五奉行) 중 하나이자 필두. 히데요시의 행정담당가. 히데요시의 대리로 명 받아 전투에 참가

 

 

 

 

 

 

고바야카와 타다카게(소조천융경)- 일본 벽제관 전투에서 매복계책으로 이여송과 요동기병들 관광보낸 장본인. 그러나 전에 이치전투에서 권율한테 발린 경력이 있음. 당시 전투 참가한 일본장수 중 가장 S급이라 할 수 있음. 도쿠가와랑 같은 히데요시의 오대로(五大老) 중 하나로 임명됨

 

 

 

 

 

 

 

오오타니 요시쓰구(대곡길계)-미쓰나리와 더불어 히데요시의 정략가 오봉행 중 한명, 히데요시가 말하길 '그에게 100만명의 병사를 주어 마음대로 부리게 해보고 싶다' 라고 평함

 

 

 

 

 

 

 

 

그외 킷카와 히로이에(길천광가)

 

 

 

호소카와 타다오키(세천충흥)

 

 

 

 

 

 

 

모리 히데모토, 마에노 나가야스 등 

 

오대로급 2명, 오봉행급 2명, 제 1군 3군 대장 등 일본군 중역들과 전국시대 거친 군사 '3만명' 참전

 

 

 

 

 

 

 

 

2)이에 맞서는 조선군 라인업+당시 상황

 

권율:당시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웃기게도 임진왜란 10년 전인 1582년 식년'문과' 에 급제 한 문관 출신, 아버지가 영의정 권철이라 권율은 금수저 물고  46살까지 백수짓 하고 놀다가 취직했음. 

 

 

 

 

 

 

 

그러나 용인전투 대패속에서 군사들 추스리고 이치전투에서 일본군 네임드 고바야카와 타다카게 저지 성공하고 독왕산성 전투등 한양 후방에서 일본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리고 행주에선 보다시피 3천가지고 저 위의 장수들 + 3만 일본군과 싸워 이김 ㄷㄷ

 

 

 

 

 

 

 

행주대첩 당시 권율 휘하 병사 선거이,조방장 조경,의병장 김천일,승장 처영 등 관군 의병 승병 연합 총 '3천명'

 

사실상 권율 원톱 체제

 

 

 

 

조선군은 당시 보유하던 화포(+신기전) 적극 활용하였고 이시다 미쓰나리,우키다 히데이에 등 일본 장수들이 쳐 맞고 나가 떨어짐. 당시 일본 전투방식이 대장급이 나서는 경우가 드문데 총대장 까지 맞아 부상당했다는 것은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나함을 보여주는 것. 행주치마로 이긴거 아님.......

 

 

 

 

 

 

 

 

 

 

전투 전 상황도 조선에게 불리했던게 이여송의 명이 벽제관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탈탈 털리고 철수한 상태였음. 이에 일본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반면 명과의 협공을 준비하던 조선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행주에 멍하니 주둔한 상태였음. 일본군은 조선군까지 조질려고 행주로 왔던 것 

 

 

 

 

 

 

 

그리고 당시 전장이었던 행주산성은 석성이 아니라 토성이었다. 해발도 고작 125m, 경사도 그리 험하지 않아 그다지 천혜의 요새가 아니었음. 그나마 위안인게 한강을 끼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것또한 여차하다간 신립꼴 나기 쉽상.그러나 권율은 이곳을  '목책'으로 둘러싸서 방어함. 그리고 승리했다.

 

 

 

왜사가 웃으며 ‘전사자가 과연 많았고 부상자도 많았다. 그 당시 제장이 분을 이기지 못하여 각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며 서로 맹세하고 기필코 다시 싸워 보복하려고 근처에 있는 왜병 10여만 명을 불러 모아서 날을 택하여 거사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조선 장수가 파주로 진을 옮겨버렸다. 파주 산성은 공략하기가 행주 산성보다 더 어려웠기 때문에 행군하다가 중도에서 되돌아왔다.

-선조 57권, 27년(1594 11월 18일(임진) 2번째기사-
권율이 김응서와 왜장이 만난 일을 치계하다

 

실록에 나오는 고니시의 사신이 김응서에게 말한 내용임. 행주대첩이 일본군에게 얼마나 쓰라렸는지 잘 알려주는 대목

 

 

 

 

 

 

 

 

 

두줄요약.

1. 전국시대 거친 일본 무장들과 3만명 VS 46세까지 백수 생활하던 문관 출신 등 3천명

2. 후자 승. 행주대첩 ㅆㅆㅆㅅㅌ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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