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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궁시렁 궁시렁

어느때보다 세계 3차대전에 가까웠던 시기들

by 멀리던 2022.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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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 베를린봉쇄 (Berlin blockade) 1946

 

 

1948년 3월 서방국가들은 그들이 점령한 독일 지역을 하나의 경제단위로 통합시키기로 결정하자, 소련은 이에 대한 항의로서 연합국관리위원회에서 탈퇴함. 소련은 이를 자기들의 동독통화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베를린으로 가는 육로를 막아버림(당시 베를린은 소련점령지역 한복판에있었음 2차대전때 서방과 소련 반반씩 나눠가지기로합의해서) 저 상황을본다면, 서방과 소련사이에 전쟁이 일어날것이라는것은 자명해보였으나

서방과 소련은 나름대로 각자 약점이있었음 

서방은 전쟁을한다면 서베를린을 포위한 50만의 소련군과 싸워야할판이였고 동독에 주둔한 소련군의 숫자는 정말 상상을 초월했음 

소련도 전쟁을한다면 2차대전때의 출혈이 큰 상태에서 서방과 전쟁을한다면 승패를 장담할수없었고 무엇보다 미국의 핵무기가 두려웠음 

서방의 전문가,정치인들도 이 상황은 노답이다, 베를린을 포기하자라는 의견을 가졌으나 

 

 

우리의 천조국은 무려 항공수송으로 물자를 베를린에다가 갖다놓기시작함 

소련군은 벙쪄서 결국 육로를 개방함 

 

4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76)

 

 

많은사람들이 아는 사건이지 

이 사건은 정말 북괴군의 수준이 야만인급이라는것을 보여준사건이다.

 

우리 국군은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를 베려고했는데 북한군의 항의에 맞부딛혀서 그냥 가지치기만하겠다고 합의봄(북한도동의)

그래서 다음날 가지치기 하고있는데 박철중위및 북한군 30여명의와서 가지치기를하고있던 미군병사 보니파스대위의 머리를 도끼로 찍어버림

결국 이 사건을 본 박정희대통령의 유명한말이있지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 

 

일단 이 사건을 본 미국은 제대로 꼭지가 돌아버림 결국 양측이 대치하는 폴버니언 작전을 시행하고 군함밎 비행기 그리고 미해병대 증파요청을함 

이 이하는 그 당시 한국에 파견될예정이거나 파견되었던 무기및 병력들임 

 

  • 12,000명 증파요청. 그 중에는 오키나와에 주둔 중인 미 해병대 1,800명도 포함됨.
  • 미 육군 정예병력으로 20여대의 차량과 813명 규모의 태스크포스 비에라(Task Force Viera)를 편성.
  • 미군 M728 공병전차가 자유의 다리조준 그리고 미군 공병부대가 임진강에 도하준비를 위해 다리 설치
  • DMZ 근처에 미군 호크 지대공 미사일 전진배치, 한미연합군 보병부대와 자주포들이 대기중
 
당연히 중국과 소련은 당황함 소련군은 충분히 저런 병력배치에도 대응할수있었지만 특히 중공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수밖에없었음 
결국 소련과 중국은 김일성한태 3차대전 일으킬려고 작정을했냐면서 김일성한태 회담에 튀어나가라고 협박함 
아 그리고 나중에 비밀문서가 풀렸었는데 
저때 미국은 북한전토점령은 무리라고 생각했고 개성까지 올라갈 계획은 세웠다고하더라 
그렇게됐으면 개성공단도 없었는데 ㅅㅂ 
 
그리고 이제 3위부터 3차대전에 정말 근접했던 레전드 사건들이 나온다 
 
3위. 중소 국경분쟁 (1969) 
 
 
이 사건은 정말 특이한사건임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도 서방과 공산주의 국가들의 대립으로 3차대전이 일어날거라고 생각했는데
공산주의대 공산주의 국가의 분쟁으로 3차대전이 일어날거라고 생각하니 이상하지?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은 좀 복잡한데 일단 이 시기 소련이 스탈린격하운동을벌이고 스탈린을 빨아재끼던 마오쩌둥의 심기를 건드리는것부터 시작함
결국 소련은 중국한테 거지새끼들이라고 비난하고 중국은 공식적으로 소련을 수정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함 중국과 소련의 사이는 매우 안좋아지고 이 시기 소련에게 핵무기제조법을 배워가기위해 파견된 중국 핵 과학자들이 추방당하거나 암살당했음(암살은 추정이긴하나)
 
어쨌든 각설하고 다만스키섬에서 근무를 서던 소련군과 중공군은 서로 인사하고 악수할만큼 사이가 좋았으나 국경에 대한 말다툼이 시작되고 패싸움으로 변질되기 시작함 
 
여기서 또 웃긴일이 시작되는데 소련군과의 피지컬차이에서 밀리던 중공군들이 나무몽둥이는 무기가 아니다 라는 논리로 몽둥이로 소련군을 구타 
 
소련군은 이걸 무기로 간주하고 권총으로 대응 결국 이 사건때문에  소련군 장갑차와 무장헬기가 출동하고 소련 기계화보병부대와 중국 보병사단의 충돌이 일어남 이 전투에서는 중공군이 개털림 

 

 
결국 사태가 확전되자 양측의 국경에는 소련군 60만명 중공군 80만명이 대치하고 소련군은 중국을 핵으로 샤워를시켜서 다른 나라로 만들 작정을했음 
근데 중국에는 모스크바까지 때릴 핵무기도없었고 소련과의 전쟁은 백전백패가 예상되었지 
 
하지만 중국은 운좋게도 미국이 니네 그만해라 라고 하고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반소련운동들을 수습하느냐 어영부영끝냄 
 
그리고 국경에서의 논란은 2004년에 국경선을 정하면서 끝남 
 
 
2위 쿠바 핵미사일위기 (1962)

(짤은 쿠바에 배치된 소련의 R-14미사일)
 
이 사건은 레전드사건. 국제정치학에서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사건이지 
사건의 개요를 말하자면 미국 바로 밑에있는 쿠바에 소련이 핵미사일을 배로 실어서 배치하려고하고 미국이 항공모함대로 해협을 봉쇄하고 
세계 3차대전까지 갈뻔한 사건이야
 
일단 소련이 왜 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려고 했는지는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있음 
일단 미국이 터키에다 주피터핵미사일을 배치함. 이 핵미사일은 모스크바까지 편하게 사정거리가 닿는 미사일이었음 
거기다가 당시 소련과 미국의 핵무기차이는 안드로메다 소련이 가진건 고작 66기의 SLBM과 ICBM인데 미국이 투발가능한 핵무기의 숫자는 약 1800기.. 
 
그리고 쿠바의 상황도 봐야되는데 미국이 쿠바를 침공한 피그스만사건같은걸 겪자 피델카스트로는 뭔가 소련을 끌어들여 미국을 견제할 수단이 필요했음
그래서 카스트로는 소련에게 쿠바에 중거리탄도탄 배치를 요청하고 터키의 핵미사일과 미국과 핵무기 차이에 쪼들리던 소련은 결국 이를 뒤집을수있는
이런 달콤한 제안을 받아들이게된다.
 
 
(당시 쿠바에 배치된 핵미사일의 사정거리 딱 봐도 미국이 개거품물만하다)
 
결국 2차대전때 일본을 도쿄핫으로만든 커티스르메이 장군과 군부는 선제 핵공격을 주장하기시작함 
그리고 민간전문가들은 선제 핵공격을 반대함. 왜냐하면 민간인들은 핵무기에 취약하기때문 
결국 케네디 대통령은 선제 핵공격을 하는대신 영해봉쇄를 선택함 
 
10월 24일, 케네디 대통령은 전군에 데프콘3을 발령 아울러 항공모함 8척을 포함, 무려 90척의 대규모 함대를 집결시켜 쿠바의 모든 영해를 봉쇄한다. 케네디 대통령은 카리브해로 미사일기지 건설자재를 싣고 오는 모든 선박에 대한 강제 수색 명령을 내리고 이를 거부할 시 격침시키라는 초강수를 둔다.

흐루쇼프는 미국의 쿠바 봉쇄를 "해적 행위"라고 강하게 비난하며, 미사일 부품과 기술자를 태운 자국 선박에게 이 조치를 무시하고 핵잠수함 6척의 호위 하에 쿠바로 강행 진입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정말 이때 상황은 그야말로 사람들이 누누이 말하던 내일이 오지않았으면 좋겠다가 실현되기 직전의 상황이었음
 
이때 미국의 장관이었던 맥나마라의 회고록으로 이 상황을 여렴풋이 이해할수있다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이 날 저녁을 기억한다. “회의를 마치고 백악관을 나설 때, 아름다운 가을 저녁이었다. 그러나 곧 다음주 토요일 밤에는 아마도 살아 있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결국 미국의 영해봉쇄를 뚫을 해군력이없었던 소련이 먼저 꼬리를 내리고 터키의 핵미사일을 철수시키는 조건으로 둘이 타협을 보게됨 
근데 미국은 그리고나서 지중해에 SLBM을 배치하고 소련군은 TU-160블랙잭 폭격기를 쿠바에 배치함; 
 
 
1위 1983.9.26 10시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1983년 9월 26일 0시, 갑자기 소련의 핵전쟁 관제센터에서 비상경보가 울렸다. 인공위성으로부터 "미국이 ICBM 1발을 소련으로 발사했다"는 경보가 전달됐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이 발사한 ICBM의 숫자는 5발로 늘어났다.
 
그때 당시의 상황은 정말 안좋았음 미국과 서방국가들이 에이블아쳐라는 훈련을 하고있었고 레이건대통령이 소련을 악의제국으로 비판했으며 대한민국 007항공기가 소련에의해 격추당했던 시기였음 
거기에 소련은 에이블아쳐훈련을 빌미로 서방국가들이 소련에 선제공격을 할까봐 그들을 예의주시하고있었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오늘 내일 하는지라 소련 군부와 정치국은 정말 신경이 곤두서있었지 
 
이러한 상황에서 핵미사일 발사 경보까지 나오자 관제센터는 비상사태에 돌입하고. 소련의 모든 핵미사일 사일로와 이동식 발사대에 경보가 걸렸고, 당시 관제센터의 당직이었던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는 핵전쟁의 모든 권한을 졸지에 떠안았음 
경보는 울리고 있었고, 그의 눈앞에서는 핵전쟁 개시 버튼이 깜박거렸다. 그러나 그는 냉정한 판단력으로 '만약 미국이 정말로 핵전쟁을 시작한다면 모든 ICBM을 함께 발사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컴퓨터는 겨우 5개의 ICBM만을 잡아냈다. 이건 분명 컴퓨터의 오류이거나 탐지용 인공위성의 오류일 것'이라 판단하고 핵전쟁 취소코드를 입력한 다음, 상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컴퓨터의 오류인듯하다 
 
몆시간동안 긴장이 흐르고 나중에 알고보니 인공위성이 햇빛을 ICBM의 발사섬광으로 햇갈리고 핵공격이 감지되었습니다를 외친거였음 
 
이 분이 아니었으면 세계의 역시는 1983년 9월에서 끝났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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