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고기 여섯 마리가 바다에서 조수를 타고 양천포(陽川浦)로 들어왔다.
포(浦) 옆의 백성들이 잡으니, 그 소리가 소가 우는 것 같았다.
비늘이 없고, 색깔이 까맣고, 입은 눈가에 있고, 코는 목 위에 있었다.
현령(縣令)이 아뢰었더니, 그 고기를 가져다가 갑사(甲士)에게 나누어 주었다.
내가 노가다로 찾은 것 중에서는 조선시대 괴물에 대한 기록은 이게 최초이다.
양천포는 지금의 서울시 영등포구 가양동 일대를 말한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곳에서 조수를 타고 물고기가 들어오는 곳은 아마 한강일 것이라 추측된다.
사람들은 비늘이 없고, 입이 눈 근처에 박혀 있고,
코가 목 위에 (여기서 목은 項이란 한자로, 정수리라는 뜻을 가진다.) 있다는 점을 들어서
요녀석이 범인이 아닐까 추측한다.
귀욤귀욤한 이녀석의 이름은 상괭이 또는 쇠물돼지로 불린다.
눈은 입 근처에 두개가 딱 박혀있고
비늘도 없고
색깔도 회색빛, 검은빛이고
정수리에 콧구멍도 뚫려있다.
황해에 주로 서식하기도 하고, 바닷물과 민물 두 곳 모두에서 생존 가능하기에
이녀석일 확률이 상당히 높다.
1564년 광해군 시절에도 한강에 기이한 물고기가 들어와서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돼지 같은 생김새와 3m라는 큰 크기에 사람들은 해돈(海豚)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뇌 뒤에 구멍이 있었다는 묘사로 보아 이놈도 고래일 것으로 추측된다.
한강에는 30년 전까지만 해도 짠물이 계속해서 들어왔었고, 일제시대에도 고래가 한강에 떠밀려왔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태종 5년의 괴어는 민물에 놀러온 상괭이라는 고래임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중종시기의 괴물 출현 소동에 대해 알아보겠다.
이 글은 이녀석이 메인이다.
이녀석에 대한 최초의 보고는 중종 6년(1511년) 5월 9일이 최초이다.
기이한 짐승이 나오다
밤에 개같은 짐승이 문소전(文昭殿) 뒤에서 나와 앞 묘전(廟殿)으로 향하는 것을,
전복(殿僕)이 괴이하게 여겨 쫓으니 서쪽 담을 넘어 달아났다. 명하여 몰아서 찾게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침전(寢殿)은 들짐승이 들어갈 곳이 아니고, 전날 밤에 묘원(廟園) 소나무가 불타고 이날 밤 짐승의 괴변이 있었으니,
며칠 동안 재변이 자주 보임은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녀석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임금에게까지는 보고되지 않고 넘어갔는데
난 저 마지막 문장이 심히 맘에 걸리더라.
며칠 동안 재변이 자주 보임은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이다.
마치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는 것 같았음.
중종도 앞으로 이게 얼마나 큰 소동을 불러일으킬지는 몰랐을거다.
이 건은 그냥 들짐승으로 치부되면서 어영부영 넘어간 듯 한데
무시할 수 없는 사건이 또 발생한다.
중종 59권, 22년(1527 정해 / 명 가정(嘉靖) 6년) 6월 17일(임술)
정원이 아뢰었다.
간밤에 소라 부는 갑사(甲士) 한 명이 꿈에 가위눌려 기절하자, 동료들이 놀라 일어나 구료(救療)하느라 떠들썩했습니다.
그래서 제군(諸軍)이 일어나서 보았는데 생기기는 삽살개 같고 크기는 망아지 같은 것이 취라치(吹螺赤)방에서 나와 서명문(西明門)으로 향해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서소위 부장(西所衛部長)의 첩보(牒報)에도 ‘군사들이 또한 그것을 보았는데,
"(忠贊衛廳) 모퉁이에서 큰 소리를 내며 서소위를 향하여 달려왔으므로 모두들 놀라 고함을 질렀다. 취라치 방에는 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괴탄(怪誕)한 일이니 취신(取信)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궁궐 안의 일이므로 감히 계달(啓達)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궁궐 내에 괴수가 출몰한다는 것이 임금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중종의 신변도 신변이지만
중종은 세자의 안전을 심히 염려한 듯 보였는데,
이는 이 사건으로부터 사흘 뒤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중종 59권, 22년(1527 정해 / 명 가정(嘉靖) 6년) 6월 21일(병인)
명하여 좌의정 정광필·우의정 심정을 불러 전교하기를,
“근일 궐내에서 밤에 연달아 꿈에 가위눌리는 요괴로운 일이 있었는데, 자전(慈殿)이 들으시고 깊이 불안해 하신다.
그리고 세자가 나이 어림을 염려하여 간절히 이피(移避)시키려 하신다.
내가 경솔히 이피시키는 것은 불가하다는 뜻으로 아뢰었지만 굳이 이피시키려 하신다.
만일 상전(上殿)이 이어하신다면 정성(定省)이 또하 어려울 것이므로 나도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하였다가 안정된 뒤에 환어(還御)하려 하는데 어떻겠는가?”
중종이 쫄보인진 모르겠으나 일단 세자의 거처를 옮긴 뒤에 자신도 거처를 옮기고
이 소동이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뜻을 보이고 있어.
이게 꽤 쇼킹한 일이었는지 이 말을 듣던 영의정과 좌의정은
“요괴에 대한 일은 안정하면 자연 그치게 되는 것인데, 어찌 경솔히 이피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이런 요괴가 있다 하더라도 모름지기 진정해야 할 것이요, 요동해서는 안 됩니다. "
라고 말한다. 충신 ㅍㅌㅊ?
지금으로치면 청와대 뒷산에 괴수가 출몰한다는 괴담만 듣고 대통령이 거처 옮기는 꼴이지.
영의정과 좌의정은 음모론에 휘둘리지 않는 걸 보니 사스가 고시패스한 사람들은 클라스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중종은 ㅂㄷㅂㄷ 하면서 거처를 옮길 기회만 노리게 되는데
그러자 신하들은 중종을 적극적으로 말리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상소문은 홍문관에서 나온 것이다.
6월 23일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 박우(朴祐) 등이 아뢰기를,
“근일 물괴(物怪) 때문에 궁내에서 경동하여 이어하시려 하고 있습니다.
처음 본 자가 유식한 사람이 아니고 무지한 군인이었으니, 그 요괴스러운 말의 진부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가령 이런 요괴가 있었다 하더라도 임금이 심지(心志)를 굳게 정하여 동요하지 않은 뒤에야 아랫사람들 또한 의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어하신다면 하인들이 미혹, 와언(訛言)을 전파하게 되어 그 끝의 폐단이 반드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대저 임금이 심지를 굳게 정하면 요괴는 절로 멈추는 것입니다. 이어하지 마소서.
6월 25일(경오)
홍문관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삼가 살피건대 근일 궐내에서 숙직하던 군사가 괴물이 있다는 헛소리를 전하자, 한 사람이 부르면 백 사람이 부동하듯이 휩쓸렸습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미혹되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지만,
유식한 자들 또한 덩달아 날조하여 형적이 있다고도 하고 혹은 소리와 냄새가 났다고도 하니,
근거 없는 괴설(怪說)이 어쩌면 이렇게 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가령 그런 요괴가 실제로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려(邪戾)한 기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이는 미혹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진실로 사실을 밝혀 진정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데 지금 위에서 먼저 경동하니 아랫사람의 경황(驚惶)이 이 때문에 더욱 심하여져서 아무리 엄한 법으로 금지해도 진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전일 헛말 한 자를 철저히 다스리지 않으면 신들은 사특한 말이 날마다 불어나서 끝내는 구원할 수 없게 될까 저어스럽습니다.
허망한 말이 근거 없음을 살피고 인정은 경동하기 쉬움을 염려하시어, 처음 말을 낸 자를 통렬히 다스리소서. 그래야 인심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상소문은 이 외에도 6월 26일까지 계속 쏟아진다.
그 중에서도 맘에 와닿는 두개를 골라봤는데, 이거 두개는 원문을 읽어봐도 좋을 듯 하다.
쨋든 상찌질이 중종은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이 소동이 원인이 아니라 하지만 누가봐도 이 소동을 원인으로 해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중종 68권, 25년(1530 경인 / 명 가정(嘉靖) 9년) 7월 16일(계묘) 1번째기사
대비전·대전·중궁전·세자빈·세자가 경복궁으로 이어하다
대비전이 경복궁으로 이어하였다. 대전(大殿)·중궁전(中宮殿)·세자빈(世子嬪)이 이때 함께 이어하였고 세자가 제일 나중에 이어하였다.
【대비가 거처하는 침전에는 대낮에 괴물이 창벽(窓壁)을 마구 두드리는가 하면 요사한 물건으로 희롱하기도 했다. 상(上)이 곁에 모시고 있지 않을 때에는 못하는 짓이 없이 마구 난타했으므로 이어한 것이다.】
진짜 괴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비가 거처하는 침소에 괴물이 직접 영향을 끼친 것도 같다.
이 글 보면 거처 옮긴것이 그렇게 무리는 아닐지도..
이렇게 성공적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괴수는 꾸준히 출몰하게 되는데,
궁궐에도 다시 얼굴을 비춘다.
중종 73권, 27년(1532 임진 / 명 가정(嘉靖) 11년) 5월 21일(무진) 3번째기사
금군이 밤에 놀라다
금군(禁軍)이 밤에 놀랐다. 어떤 자가 망령된 말로 ‘말[馬]같이 생긴 괴물이 나타나 이리저리 치닫는다.’고 하자,
금군들이 놀래어 소리치면서 소동을 피웠다.
궁궐을 지키던 금군들이 소란을 떨 정도였으니, 이 괴수는 중종 때에 한해서는 민심에 상당히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중종 때 기록된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고, 이녀석은 인종때도 다시 얼굴을 비춘다.
경성에 밤에 소동이 일어나다
경성(京城)에 밤에 소동이 있었다.
상께서 승하하시던 날에 경중(京中) 사람들이 스스로 경동(驚動)하여 뭇사람이 요사한 말을 퍼뜨리기를
‘괴물이 밤에 다니는데 지나가는 곳에는 검은 기운이 캄캄하고 뭇수레가 가는 듯한 소리가 난다.’
서로 전하여 미친 듯이 현혹되어 떼를 지어 모여서 함께 떠들고 궐하(闕下)로부터 네거리까지 징을 치며 쫓으니 소리는 성안을 진동하고 인마(人馬)가 놀라 피해 다니는데 순졸(巡卒)이 막을 수 없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굇수가 나타나고서 사흘 뒤, 인종은 죽게 된다.
이것으로 이 괴수에 대한 기록은 여기서 끝이다.
뒤에 왕들을 더 뒤져봐도 이 녀석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약 200년 뒤에 프랑스 제보당에서 이와 비슷한 녀석이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고 다닌다.
프랑스 정부의 명예를 실추시킬만큼의 신출귀몰한 녀석이었는데
생김새 자체는 이녀석과 상당히 흡사하다. 유랑을 간건가..
쨋든 이녀석은 다음에 시간이 되면 다루도록 하자.
위 사진은 괴물과는 무관함. 걍 비슷한 이미지여서 넣어봤음
영조 66권, 23년(1747 정묘 / 청 건륭(乾隆) 12년) 11월 5일(신묘) 3번째기사
평안도에 나타난 괴수를 병사가 잡아 가죽을 올려 보내다
괴수(怪獸)가 있었는데,
앞발은 호랑이 발톱이고 뒷발은 곰 발바닥이며,
머리는 말과 같고 코는 산돼지 같으며, 털은 산양(山羊) 같은데 능히 사람을 물었다.
병사(兵使)가 발포해 잡아서 가죽을 올려 보내왔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누구는 얼룩말이라고 했고 누구는 맥(貘)이라고 하였다.
당최 무슨 동물에 대한 설명인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
얼룩말이 산양하고 비슷한 털이 있는지도 의문이고..
그냥 좀 큰 산짐승을 착각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어쨋든 이것도 조선시대의 불가사의한 생명체 출현 사례 중 하나이다.
이 이후로는
1934년에 대동강에서 괴어가 출몰한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어선을 동원해 포획한적이 있었고,
1920년대에도 한강에서 고래와 비슷한 시체를 건져올린 사례가 있다고 하는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질 않아서 쓸 수가 없다.
회의론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중종의 경우에는, 중종 집권 당시 혼란스러운 사회상이 반영된 얘기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목격한 사람들은 대부분 군인, 또는 상민들로 배우지 못한 미처한 사람들이었고,
그 모습이 벼슬아치들에게 확인된 바 없으므로 괴담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 당시 퍼지던 음모론에
중종도 우왕좌왕하고
신하들이 진정하셈!! 하고 말리는거 보면 요즘하고 조선하고 흡사한 거 같기도 하다.
조선시대때 기록된 괴수 기록은 이게 전부다.
찾지 못한 것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괴물, 괴수, 요괴 키워드로 나오는 모든 결과를 다 뒤져보고 나온 결론이기에
내가 놓친 부분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거 몇 건 찾는데도 눈알 빠질지경인데 역사연구하는 역사학과 교수들은 얼마나 고생일지 모르겠다.
이번엔 텍스트가 좀 많은데
다 중요한 내용이고, 꼭 읽어야 할건 진한 글씨로 크게 표시했으니까 읽어봐주었으면 좋겠다.
-끗 -
'역사 궁시렁 궁시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러시아인들이 아디다스에 미쳐있는 이유 (0) | 2022.08.21 |
---|---|
이순신 급의 공을 세웠지만 팽 당한 류성룡 그는 누구인가 (0) | 2022.07.07 |
200년 에도 막부의 멸망, 메이지 유신, 보신전쟁 (0) | 2022.07.07 |
[삼국지]정사 속 관우에 대해 제대로 알자 (1) | 2022.07.07 |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치게 된 이유 (3) | 2022.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