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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에도 막부의 멸망, 메이지 유신, 보신전쟁

by 멀리던 2022.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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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6월 3일, 미합중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인솔하는 4척의 함대가 우라가 항에 입항했다.

 

항만에 모여있던 일본인들은 거대한 크기와 짙은 검은색의 외양, 기괴하게 움직이는 외륜, 끊임없이 검은연기를 뿜어대는 증기선에 기가 질렸다.

 

일본 근대사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흑선내항黒船来航 사건이었다.

 

 

<미국 동인도회사 함대 사령장관 매튜 페리 Matthew Calbraith Perry 제독>

 

 

 

 

페리 제독은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갖고 일본과 미합중국과의 통상을 요구했고

 

에도 막부는 늘 하던대로 단호히 거절하려 했으나 여느때와는 달리 군함 4척을 몰고 온 페리 제독의 고압적 자세에 겁을 먹었다.

 

결국 어르고 달래서 내년에 화답해주겠노라 하고 돌려보냈으나 1년후 1854년, 약속을 칼 같이 지키는 페리 제독은 이번에는 9척을 몰고 왔다.

 

페리는 항만에서 예포 핑계로 100발 이상의 공포탄을 쏘아댔고 이러한 강경한 태도에 에도 막부는 충돌을 회피하고자 막부 개국이래 국시였던 

 

쇄국정책을 풀고 미합중국과의 화친조약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동방의 섬나라 일본의 오래되고 낡은 빗장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미일화친조약 영어원문>

 

 

한번 뚫린 막부는 맛을 들렸는지 잇달아 영국, 러시아, 프랑스와도 조약을 맺었고 이들 조약은 하나같이

 

최혜국 조항 등 명백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일로 인해 막부의 국시였던 쇄국정책은 끝장났고 막부의 권위는 실추됐다. 

 

 

대포 한 발, 칼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맥 없이 나라의 문을 연 막부에게 각 지방의 (번藩)들은 크게 분노했고 그 중 가장 격하게 반발한 것이

 

<사쓰마薩摩>, <초슈長州>, <도사土佐> 등 평소부터 막부에 반감을 심하게 가지고 있던 유항세력이었다.

 

이들은 존왕양이를 내세우며 덴노天皇의 권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펼쳐 나라의 기강을 바라잡자고 부르짖었다.

 

덴노의 권위를 세우다니? 이는 사실상 막부와 쇼군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초슈, 사쓰마의 문장>

 

 

 

 

막부는 이러한 반발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안세이 대옥安政の大獄>으로 존왕양이파를 탄압하는 등 실추된 막부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덴노의 재가없이 멋대로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안세이 옥사를 일으킨 막부의 중신 이이 나오스케가 에도성 사쿠라다몬에서

 

유항파 사무라이들에게 대낮에 참살되고, 각지의 유항파 번들이 전투태세를 갖추는 등 존왕양이파는 단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낡고 이빨 빠진 막부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타도의 대상이었다.

 

 

 

<사쿠라다몬의 변>

존왕양이파 무사들은 백주대낮에 막부의 중신을 참살했다.

 

 

 

 

그러나 서남웅번, 존왕양이파의 양대산맥인 사쓰마와 초슈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인 동시에 라이벌이었고 추구하는 방향이 달랐다.

 

대 막부 강경파가 득세하는 초슈와는 달리 사쓰마는 막부와 존왕파의 공생을 주장하는 공무합체론公武合體 을 주창하고 있었고

 

초슈는 사쓰마를 막부와 타협한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더군다나 사쓰마는 1863년, 영국상인을 죽인 일이 계기가 되어 터진 영국과의 전쟁으로 철저하게 박살이 났고

 

이를 계기로 양이론이 얼마나 공허한 주장인지 깨달았다. 이제 더는 칼의 시대가 아니었다. 근대적인 총과 대포로 무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쇄국에서 개국으로 노선을 전환한 사쓰마는 막부의 아이즈번과 연합하여 교토 조정내의 초슈 강경파들을 쓸어냈고

 

격분해서 교토로 진격해 온 초슈군 또한 격퇴했다.

 

초슈는 초슈대로 덴노를 선동해서 받아낸 양이칙명에 의거해 미국상선에 포격을 가한 일로 미국,영국,프랑스,네덜란드 4개 연합국의 공격을 받았고

 

사쓰마와 마찬가지로 처절하게 박살이 난다.

 

 

막부는 이틈을 타 재빨리 초슈정벌을 선포하고 저항할 힘이 없던 초슈는 강경파들을 처형하고 쫓아내는 조건으로 막부에 항복한다.

 

 

 

<초슈 번 해안포대를 점령한 프랑스 해병대>

 

 

 

막부는 이것으로 반막부 세력을 일소했다고 의기양양했지만 여전히 남아있던 반막부 세력과 친막부 보수파 세력이 충돌해서 내전으로 번졌고

 

결국 초슈의 권력은 다시 반막부 세력 유신지사들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사카모토 료마>

 

 

토사번의 번사였던 사카모토 료마는 사쓰마와 초슈, 두 양대 유신 세력을 중재하여 오랜 앙금을 풀고 토막討幕, 즉 막부토벌의 기치 아래

 

1866년, 삿쵸동맹薩長同盟 을 성사시켰고 초슈는 부유한 재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근대화한 군대, 그리고 은연중에 초슈를 돕는 사쓰마의 지원아래

 

막부의 2차 초슈정벌을 격퇴한다.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는 이대로 양쪽 중 어느 하나가 끝장날 때까지 싸우기보다는 도사 번의 중재를 받아들여

 

차선책을 선택했다. 바로 모든 권력을 덴노에게 바치는 대정봉환大政奉還 이었다.

 

 

 

<대정봉환>

 

 

이는 그 동안 막부가 실질적으로 행사해오던 모든 권력을 덴노에게 바치고

 

쇼군 이하 막부 중신들은 모두 덴노의 조정아래 편입된다는 방안이었다.

 

쇼군 관직은 폐지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신정부의 내대신 직위에, 

 

막부 중신들은 정부 의회에 의원과 각료로서 편입, 사실상의 항복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삿초동맹이 그토록 외치던 덴노에의 권력반환을 스스로 결단해버린 요시노부의 결정에 토막파들은 떨떠름했지만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물과 기름은 결단코 섞일 수 없는 법. 임시방책으로 봉합해 버린 상처는 곪아 터질 수 밖에 없었다.

 

 

사쓰마를 포함한 5개번은 12월 8일, 덴노의 지지 아래 친위쿠테타를 결행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내린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내대신 직위를 반납하고 도쿠가와 가의 영지 또한 반납하라는 칙명을 내린다.

 

 

뒤통수를 맞은 막부의 중신들은 격분하여 결사항전을 외쳤지만 끝까지 충돌을 피하고 싶었던 

 

요시노부는 자기 세력을 이끌고 오사카 성으로 내려가 틀어박힌다.

 

 

 

<프랑스 군복을 착용한 도쿠가와 요시노부>

요시노부는 오사카 성에서 외국 공사들을 맞이하며 여전히 자기가 일본의 대표이고

외국과의 수교는 막부에서 맡을 것이라 말했다.

 

 

 

 

당연히 전쟁을 걸어오리라 예상했던 토막파는 당황했지만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미 계획한 대로

 

낭인들로 하여금 에도 성내에서 막부의 상인, 관리 등을 폭행하고 금품을 빼앗는 등 난동을 부려 막부를 도발했다.

 

쇼나이번의 주둔지를 낭인들이 습격하고 격분한 쇼나이번 번사들이 에도 성내 사쓰마 저택으로 몰려가 대포로 포격했다.

 

 

이 충돌소식은 오사카 성에도 전해져 막부는 그야말로 들끓는 화산처럼 분노했다. 

 

200년 도쿠가와 막부의 상징 에도성이 폭도들에게 능멸당하고 있었다.

 

요시노부에게 몰려가 거병하여 역적들을 토멸하자고 울부짖었다.

 

요시노부는 끝까지 충돌을 피하고 싶었으나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

 

1868년 1월 1일, 막부는 마침내 사쓰마 토벌을 결의하고 막부보병대, 아이즈번병이 주력이 된 1만 5천명의 토벌군이 수도로 진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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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육군, 서양식 복식과 촌마게丁髷 의 언밸런스가 인상적이다>

 

<막부보병대>

막부육군은 프랑스 군사고문단의 훈련을 받아 프랑스의 영향이 강했다.

 

 

 

오사카에서 출병한 막부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교토로 진입하는 가도인 토바 , 후시미 鳥羽・伏見の戦い 가도로 각각 진군했다.

 

주력인 막부보병대와 쿠와나번, 미마와리구미가 토바 방면을, 아이즈번, 신선조 병력이 후시미 방면을 맡았다.

 

 

 

<막부군의 진격로>

 

 

<신선조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

흔히 알려진 푸른 옷의 사무라이 이미지와 달리 보신전쟁 시기엔

서양식 복장으로 싸웠다.

 

 

이에 맞서 토바 후시미 가도를 특어막은 신정부군은 초슈 병력이 후시미 가도를, 사쓰마 병력이 토바 가도를 맡았다.

 

이들의 총병력은 5000명에 불과했고 명백히 막부군에 비해 열세였다.

 

1월 3일, 양 군은 토바 후시미 가도에서 대치했고 막부군은 이 행렬이 쇼군의 행렬이라 주장하며 조정의 덴노께 표表를 제출하려하니

 

비키라 했다. 삿쵸군은 완강하게 거부했고 한 동안 양군의 대치가 이어졌다.

 

 

 

<삿쵸동맹 신정부군>

<막부군>

 

 

삿쵸동맹이 가장 두려운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 덴노의 니시키노미하타 錦の御旗를 받아내지 못했단 사실이었다.

 

니시키노미하타란 덴노가 조정의 적을 토벌하라는 뜻에서 토벌군에게 내리는 깃발로서 조정의 관군임을 증명하는 증표였다.

 

덴노의 조정은 이 싸움이 막부와 삿쵸간의 사적 분쟁이라 정의하고 관기의 수여를 거부했다. 

 

오히려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신 정부 의회의 중책에 앉히는 회유책까지 준비해두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막부의 군대를 조정까지 들여보낸다면 실무의 경험도 없고 전쟁의 경험도 없는 겁쟁이들인 조정 대신들은

 

막부가 하자는 대로 끌려다닐 터, 수많은 피를 쏟으며 여기까지 달려온 메이지 유신의 대의가 송두리째 날아갈 위기였다.

 

어떻게든 이 싸움에서 막부군을 격파해야했다. 구 세력의 잔재를 남김없이 쓸어버리고 조정과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나머지 지역 번주들을 끌어들여야했다.

 

 

오후 5시, 강행 돌파하려는 막부군의 대열에 사쓰마군이 포격을 가함으로써 전투가 시작됐다.

 

 

 

 

 

 

토바 가도에서의 막부군은 삿쵸군이 길을 열어주는 줄로 착각하고 2열 종대의 무방비상태로 행군했다.

 

대열의 양쪽에 배치 된 사쓰마군의 대포가 불을 뿜었고 격렬한 포화에 놀란 말이 미쳐 날뛰고 군사들이 동요했다.

 

전통적인 갑옷과 창검으로 무장한 미마와리구미가 좁은 대로에서 종대돌격을 실시했으나 신정부군의 일제사격에 격퇴된다.

 

 

 

 

 

 

더군다나 초반의 포격으로 토바 가도의 타키가와 토모아키 滝川具挙 사령관이 탄 말이 놀라 폭주해 그대로 사령관이 전장을 이탈해버렸다.

 

이 어이없는 사태에 막부군은 당황했고 사령관의 부재로 인한 지휘력 상실과 급격한 사기 저하로 승기는 순식간에 신정부군에게 돌아왔다.

 

 

 

후시미 가도에서도 아이즈번병과 히지카타 토시조가 이끄는 신선조 부대가 돌격을 실시했으나

 

스나이더 후장식 소총을 장비한 사쓰마군 소총대대 800명의 일제사격에 손쉽게 격퇴된다.

 

설상가상으로 주력거점으로 삼은 교토 봉행소가 사쓰마군의 포격에 불타버리자 더는 버틸 수 없었는지 퇴각한다.

 

 

공격이 실패한 막부군은 일시 후퇴하여 전력의 재정비에 들어갔다.

 

한편 1월 3일 밤, 이세 방면에서 막부군의 원군이 진입하고 있었지만 

 

오츠 방면에 신정부군 50명을 보고 적의 대규모 주력이 결집하고 있다고 착각, 다시 오사카로 후퇴했다.

 

4일, 신정부측 번병들이 오츠에 정말로 집결했고 이로써 막부군은 전투 한번 벌여보지 못하고 신정부군의 약점을 찌르는데 실패했다.

 

오츠 공격이 성공했다면 토바 후시미의 전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4일, 퇴각한 막부군의 진영에 신정부군이 공격을 감행했고 막부군은 밀리고 밀려 요도 방면까지 퇴각한다.

 

요도성에 입성해서 농성전을 벌일 계획이었으나 이미 형세가 기운 것을 알아차린 요도 번은 막부군의 입성을 거부한다.

 

할 수 없이 하시모토 방면으로 후퇴한 막부군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덴노가 신정부군에게 니시키노미하타를 내렸다는 소식이었다.

 

 

 

<전장에 니시키노미하타가 나타나자 막부군의 사기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니시키노미하타 수여에 소극적이던 조정은 토바 후시미 전투에서 승기가 기울자

 

이참에 노선을 바꿔 막부 토벌로 왕정복고를 완성하고자 했다.

 

수도 교토에 공격을 가했다는 이유로 막부를 조정의 적, 즉 조적朝敵 으로 규정하고 삿쵸군이 조정의 인정을 받은 관군임을 확실히 했다.

 

하루아침에 반란군이 된 막부군은 의기소침해졌고 여기저기서 탈주자가 나왔다.

 

오전 10시경부터 시작된 요도 전투는 막부군의 패배로 끝났고 신선조 대원 3분의 1이 전사했다.

 

 

 

 

<쳐발리는 막부군>

 

 

 

1월 6일, 하시모토로 후퇴한 막부군은 야전축성을 쌓아놓고 신정부군을 맞았으나 오야마자키 방면을 수비하던 쓰 번 병력이 배반하여

 

포격을 날리자 전열이 붕괴된 막부군은 또 패배하고 오사카 성으로 후퇴한다.

 

기세 좋게 오사카에서 출성했을 때와는 달리 허겁지겁 도망치는 막부병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패잔병이었다.

 

 

 

그리고 1월 6일 밤,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아이즈번주와 쿠와나 번주를 대동하고 막부 해군의 함선을 타고 에도로 도망쳐버린다.

 

 

 

<시발... 설마 진짜 질 줄은 몰랐다... 일단 튀고 보자>

 

 

설마하니 1만 5천의 대병력이 고작 5천의 삿쵸군에게 패배할 줄은 생각도 못 했던 요시노부는 큰 충격을 받았고

 

황급히 에도 성으로 도망쳤다. 

 

사실상 주력인 막부의 수장과 아이즈번의 수장이 모조리 적전도망한 상황에서 남은 오사카 방어병력은 전의를 상실했고

 

오사카성은 신정부손에 떨어진다.

 

 

<사이고 다카모리>

캬 개꿀 ㅋ 이제 막타 남았다 조지러 가자

 

 

 

이 시점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지방의 번들이 근왕파로 붙어버렸고 사실상 막부는 에도성내의

 

잔존 막부 육군과 막부해군, 아이즈번 병력, 쿠와나 번 병력이 남은 전력의 다였다.

 

하지만 여전히 강경파의 결사항전 의지는 드높았고 남은 전력도 결코 약한 전력이 아니었다. 

 

특히 막부 해군은 10척의 최식식 군함을 보유한

 

일본최강의 함대였고 이를 바탕으로 항전한다면 신정부군도 결코 승리를 장담 할 수 없었다.

 

 

 

 

신정부군은 남은 전력을 모아 에도성 총공격을 위해 진군했고

 

이를 막고자 신선조의 남은 잔존 병력 갑양진무대甲陽鎮撫隊 170명이 고후 성에서 방어전을 펼치고자 했으나

 

신정부군이 거점을 먼저 점령하여 실패로 돌아간다. 갑양진무대는 1200명의 신정부군에게 박살이 났고

 

신선조 국장 곤도 이사미도 이때 체포된다.

 

 

<곤도 이사미>

 

 

이때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완전히 전의를 잃고 주전파 중신 오구리 다다마사를 파면시키는 등 항복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애초부터 전쟁에 반대했고 주전파의 강압에 떠밀리다시피 시작한 전쟁인지라 요시노부는 승산없는 전쟁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는 영국이 지원하고 있는 반 막부 메이지 정부가 집권하기를 원치 않았다.

 

주일 프랑스 공사 레옹 롯슈Leon Roches는 

 

요시노부에게 "프랑스는 여전히 각하와 각하의 정부를 지지하며, 사쓰마에 항전해야한다." 라고 설득했으나

 

요시노부는 거부한다.

 

 

 

 

 

<님아 제가 캐리할테니 멘탈 잡고 다시 가여;;>

 

<ㄴㄴ, 걍 칼 서렌 칠거임>

 

 

 

 막부 육군 총재 카츠 카이슈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극적인 회담이 성사되었다.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신변의 보장과 에도 성내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받았고 막부 해군의 해체와 육군의 무기 및 병사들의 전면 항복을 조건으로

 

에도성은 무혈개성한다. 200년 에도는 전화를 피했고 요시노부는 시즈오카 성으로 내려가 근신처분을 받았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 막부는 끝났다. 이제는 메이지의 시대였다.

 

 

 

 

그러나 막부 주전파들은 굴욕적인 항복에 동의하지 않았고 성문이 열리기 전 에도성을 탈출해 저항을 계속한다.

 

막부육군 정예 전습대(伝習隊), 막부 보병 제7연대, 회천대(回天隊)등 총 2,000명이 저항을 벌이나 패배하고

 

센다이번의 주도로 동북지방 일대의 아이즈 번, 쇼나이 번, 요네자와 번 등이 포함 된 오우에쓰 열번 동맹이 수립되어 신정부에 반항했으나

 

5개월 간의 전투 끝에 잇따라 소속 번들이 항복하고 마침내 보신전쟁 초기부터 막부 군의 주력이었던 아이즈 번이 항복했다.

 

 

 

 

<아이즈 전쟁>

<묵사발이 난 아이즈 성>

 

 

막부군 잔존세력은 막부 해군을 이끌고 훗카이도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에노모토 다케아키 榎本武揚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에조 공화국을 수립한다. 이는 일본 역사 최초의 공화국이었으나 메이지 정부에게는 단순 반란군일 뿐이었다.

 

프랑스 군사고문단의 지속적인 지원 아래 나름대로 신정부군 함대와 해전도 벌이는 등 저항을 계속했으나

 

하코타테 해전과 육지의 패전으로 결국 항복한다. 이로써 보신전쟁은 마무리 되고 메이지 유신이 완성되었다.

 

 

 

<하코타테 전쟁>

 

 

새로운 질서를 바라던 유신 지사들의 투쟁은 기어코 막부를 멸망시켰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다.

 

일본은 근대국가로 거듭나기 위해 일대개혁을 실시했다. 기본적인 복식부터 서양식으로 바꾸는 건 물론이요 

 

폐번치현으로 기존의 번을 폐지하고 현 단위로 나누어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다.

 

기존의 사농공상의 신분제도를 철폐시켜 농민, 상인들은 모두 평민으로 동등하게 바꾸었고 다이묘 등 기존의 귀족 계급은 화족으로써 특권계급화했다.

 

정부기관과 행정제도를 근대적 체제로 탈바꿈시켰다.

 

단발령을 내려 무사들의 상투를 깎았고 폐도령으로 칼을 빼앗았다. 더 이상 구시대의 유물인 무사들의 무력은 필요없었다.

 

국민개병제를 실시해 징병제도로 일반 평민들이 국가의 무력을 담당케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개혁은 매우 급격하게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가지 못한 기존의 무사계급, 사족士族 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메이지 유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또 한번의 거대한 충돌이 예고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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