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은 모두 자기에게 주어진 몫만큼 살다가. 그것은 인간뿐만아니라 역사속의 수많은 왕조와 제국들도 마찬가지야.
각각의 왕조는 서로 연결되어 인류가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어주고있어.
그런데 어떤 문명들은 수천년동안 존재가 감춰져있다가, 알려진지 100년이 안되기도 한 문명들이 있어.
이런 문명들을 알아가게되는것은 인간으로서, 한때는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다시 찾아내는 기쁨을 맛볼 수 있게해.
위의 사진은 전설적인 히타이트 발굴의 시작이된 사자의 문이야. 한때는 히타이트의 성문이었지. 양쪽에 사자조각상이 있어서 사자의 문으로 불리게되.
히타이트라는 국가는 기원전 1천년부터 19세기까지 약 3천년동안 아무도 모르는 국가였어.
지금은 이집트에 버금가는 문명, 자신만의 종교와 문화가 있었고 철기를 사용하기로 유명하게 알려졌지만 불과 100년전만해도
사람들은 이 문의 정체를 몰랐지. 어떻게 이런 강대한 대국이 이집트나 다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는 달리 3천년동안 땅속에 잠들어있게 되었을까?
고대의 사람들이 이런 유적들을 지나면서 남긴 여러가지 의문들은 있었지.
1. 멸망 이후 첫 발견 -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헤로도토스가 터키지방을 여행하면서 처음으로 발견한 이 부조물은 히타이트의 부조물인것으로 드러났어.
하지만 헤로도토스는 이게 이집트의 유적이며 이집트가 터키반도까지 진출한 증거라고 생각했었지.
그림 양식이 이집트와 비슷한게 그럴듯한 추측이었어.
하지만 뒤에있는 문자를 이집트문자와 대조했을때 이건 이집트 부조가 아니란걸 알 수 있었을거야.
이 부조는 2천년이 지나서야 오스만 여행가 에블리야 첼레비에게 다시 발견되고
프랑스인 여행가 장 오테에게도 다시한번 발견되. 하지만 이 부조만으로는 히타이트의 존재가 설명될 수 없었고
다들 이집트 문명의 것이 아닐까? 라는 추측만을 남기고가.
2. 중요한 단서의 발견.
히타이트의 본국은 아나톨리아 반도에 있었지만, 이들의 존재를 알리는 단서는 모두 중동 연안지방에서 발견되었어.
만약 히타이트가 이 지방을 정복하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우리는 히타이트의 존재를 몰랐을거야.
페트라를 발견한것으로 유명한 스위스의 여행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트는 시리아의 하마(홈스,하마스)를 여행하면서
처음으로 히타이트 문자가 새겨진 기념비를 시장바닥에서 발견하게되. (ㄷㄷㄷ)
이후 1822년 자신의 여행기에 시리아의 한 시장에 생전 처음보는 이집트의것도아니고 메소포타미아지역것도 아닌 문자로 씌여진 기념비를 발견했다
라고 기록을 남겼는데 아쉽게도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어.. 슬프네 ㅠㅠ
하지만 이 히타이트 문자는 1870년 미국인 탐험가들에게 의해 재발견 되었고
그들은 이 비석의 탁본을 뜨려고 하였으나 지역주민들의 비석에 대한 미신때문에 거부당하였어
이후 영국인 선교사가 이 비석에 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오스만 정부와의 조정으로 처음으로 이 비석을 떼어내고
대영박물관과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보내지면서 서방세계에 히타이트 유적이 알려지게 되었지.
3. 첫 유적 발굴
석판을 떼온것에 힘입어 영국정부는 터키의 카르케므쉬 지방에 첫 유적 발굴작업을 시작해.
그러자 이런 신전터가 발견되었는데 놀랍게도 여기 비석에 씌여진 글이 시리아의 그것과 일치했어.
즉 시리아일대의 광범위한 지역에 우리가 모르는 어떤 거대한 문명이 있었다는것이 었지.
이는 많은 학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고고학연구에 불을 붙였지.
이때 성경의 내용이 재조명되었고,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온 헷족이 이들이 아닐까 라는 추측이 있었어.
짐작가는대로 지금의 히타이트라는 말의 어원이 바로 이 헷족이야.
4. 프랑스의 택시에
비슷한시기, 시리아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발굴과는 별개로 프랑스의 여행가 샤를르 택시에는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여행하다가
앞서 헤로도토스가 발견한 부조물들과 이런 해괴한 석조를 추가로 발견하게되었지.
이들을 모아서 다시 유럽에 소아시아의 수수께끼라는 이름으로 책을 썼는데
고고학자들의 조사결과 여기의 문자들이 시리아와 카르케미쉬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점을 알아내었어.
이것은 히타이트 연구에 적잖은 충격을 가져왔어.
이때까지 이 미스터리 문명유적은 시리아 북부지방에서만 발견되었거든
그런데 저기 멀찍이 떨어진 아나톨리아 서중부지방에서 같은 문명의 유적이 발견된거야.
그 말인 즉슨 이 문명은 시리아 북부뿐만아니라 아나톨리아 전체를 장악했던 초거대 문명이었던거지.
그도 그럴것이 19세기 고고학연구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지방에서만 이루어졌어.
고고학계에서 이 두 지방의 연구는 흥미롭고 인류의 요람과 뿌리를 알아내는것으로 여겨져왔어.
그런데 갑자기 이 두 강에서 멀리있는 별 볼일없는 고원지대에 엄청난 규모의 인류문명지가 발견된거야.
이후에도 수많은 탐험가들이 새로운 시장인 아나톨리아 고원으로 몰려와서 새로운 유적지가 계속해서 발견되고 연구되지 못한채 유럽에 알려졌지.
시리아의 유적지와는 달리 아나톨리아의 유적지들은 여행가들에게 발견되고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어.
위의 사진은 이후 발견된 보아즈쾨이의 유적지. 이 유적지는 뜬금없게도 히타이트와는 상관없이 로마시대에 아나톨리아 지방에 수수께끼의 켈트족 문명이 있었다는 소문을 믿고 찾아온 또라이에의해 발견되었어. 이후 이곳이 히타이트의 수도인 하투샤임이 밝혀졌지.
5.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기록
이후 이집트에서 발견된 이 기념비의 기록은 히타이트의 비밀을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어
이 비석에는 람세스 2세가 헤타의 왕과 전쟁을 치르고 조약을 맺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 유적지에서도 헤타에 대한 언급이 발견되면서 드디어 영국인 고고학자가 성경의 헷족,
이집트의 헤타족은 시리아와 아나톨리아 유적들의 주인이며 이에대해 히타이트인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지.
이때가 1879년이었어.
하지만 유적들의 주인만을 이제 겨우 알아내었을뿐, 이들의 문자 문화 업적에대해서는 여전히 아는것이 없었지.
그저 이들이 이집트 신왕조시대와 아시리아와 동시대 문명이었다는것 외에는
6. 히타이트어 점토판 발견
19세기 후기
이집트의 텔 엘 알마르나 지방에서 대량의 점토판이 발견되었어. '
이 점토판들의 특징은 당시 아시리아가 사용하던 문자로 씌여진 것인데 발굴당시에 아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문자들에대한 연구는 이미 많이 이루어져 있었던 상태라 이 글을 읽을수는 있었다고해. 그런데 읽고나서 보니까 알려져있던 아시리아어의 의미가 아니었지.
아시리아어가 아닌데 설형문자로 새겨진 이유는 당시 아시리아가 상업적으로 중동지방을 지배하고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UN이 영어와 프랑스어를 국제어로 사용하듯 아카드어를 공식외교문서로 사용하고 있었다고해.
그 이후에도 아나톨리아와 여러 중동지방에서 아시리아어가 아닌 히타이트어로 추정되는 여러 점토판과 비석들이 발견되었어
7. 20세기초
한편 1800~1900년대의 유럽 정세는 이랬어
오스만 제국은 쇠퇴하고있었고 그리스가 막 독립하고 영국은 유럽정세에는 관심이 없고
러시아는 간간히 동유럽의 확장을 노리고있고 프랑스와 독일은 경쟁관계에 있었지.
망해가던 오스만은 프랑스와 독일 둘 다 친했는데 특히 대 러시아 동맹으로서 독일과의 교류가 더 잦았지.
오스만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점령한 이후로 반러시아 감정이 커졌고
독일은 러시아의 동유럽 확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참고로 이떄부터 시작된 오스만-독일 동맹의 여파로 현재까지도 독일에 사는 터키인이 가장 많다고해.
이미 망해가는 제국이라 밥먹듯이 반란이 일어나는데
신경쓸게 하나 둘이 아니던 오스만은 자기 제국의 영토내에 밝혀지지 않은 유적이 있건말건 신경쓸일도 아니고
그럴 연구기관도 없었어.
그래서 이 히타이트 연구권을 갖기위해 여러나라들이 참여했는데
프랑스는 이미 이집트를 탈탈 털고 있었고
영국은 식민지를 탈탈 털어먹고 사는데
독일은 딱히 국외에 할만한게 없다고 아쉬워하며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던 독일 황제 빌헬름은 오스만 정부에 뇌물까지 먹였고
정치적인 이유로 독일과의 친선을 도모했던 오스만은 독일에게 히타이트 발굴을 허가해주었어.
물론 다른 여러나라들도 계속 발굴은 했지만 독일이 주를 이루었지.
이때 발굴된 수많은 점토판들은 베를린으로 옮겨져서 연구되었어.
현재 히타이트학의 최고권위가 독일대학에 있고
오스만 영내에 있던 여러문명의 유물들이 루브르와 대영박물관에 있는 이유도 이 시대의 상황때문이기도 해.
읽을 수 있는 히타이트어들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처음보는 언어인지라
히타이트 점토판들의 해독은 1910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인 연구작업이 진행되었지.
그 전까지는 발견되는 점토판이 한둘이 아니라 그거 뽑고 보존하고 정리하는데에만 엄청난 시간이 걸렸던거야.
점토판들이 땅을 파서만 나온것도 아니야. 시리아 동네 시장에서 찾은 점토판무더기만해도 수백개며
이 중 진품과 가짜를 구분하는데에도 깨나 힘이 들었던거지.
8. 히타이트인은 빵을 먹고, 물을 마신다
1910년에서야 시작된 히타이트어 연구.
하지만 세계사를 배운 사람들은 이 시기에 무슨일이 있었는지 알거야.
1차 세계대전이지.
1914년,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드 왕자가 암살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에 선전포고.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동맹이었던 독일제국도 러시아에 선전포고
하지만 독일은 양쪽에서 전선이 생기는걸 막기위해 서쪽으로 벨기에를 먼저 침공. 이에 벨기에와 연합인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에 참가하며서 1차세계대전이 되었지. 친독 반러파였던 오스만도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게되었어.
대전기간동안 발굴작업은 중단되었어. 하지만 이미 베를린으로 입수해온 점토판들을 정리하면서 해독작업에 박차가 가해졌지.
nu ninda-an ezzatteni vadar-ma ekutenni
당신은 빵을 먹고, 물을 마신다.
그리고 이 사람이 최초로 위의 히타이트어를 해독한 체코인 흐로즈니 교수야.
그는 체코인이지만 독일 오리엔트 학회소속이었고 히타이트 발굴 이전에는 아시리아 발굴에 종사하고있었어.
그는 전쟁중 1915년 지하실에서 이 문장을 되풀이하다가 히타이트어가 인도-유럽어계에 속한 언어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는
다른 언어들과 연관점을 찾아내서 해석에 성공하였지.
9. 인도 유럽어계
파란색-라틴어계
초록색- 슬라브어계
빨간색 - 게르만어계
똥색 - 인도계
이 인도와 유럽에 걸쳐 분포된 ( 식민지시대후부터는 아메리카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 및 몇몇 아시아지역까지 퍼진) 언어들은 인도-유럽어계라는 더 큰 분류에 들어가있어.
우리나라도 가끔 터키가 형제의 나라다 하면서 알타이어계 얘기 나오잖아.
인도-유럽어계의 특징은
You eat chicken
너 먹는다 치킨
이렇게 주어-동사-목적어의 형태를 띈다는 것이야.
물론 다 이런게 아니고 다른 기준도 있을텐데 내가 언어학은 잘 몰라서 위키 검색해보니 이렇게 나오네.
그런데 분명 같은 민족에서 시작해서 퍼진 언어일텐데
인도와 유럽 사이의 딱 터키 부분이 비는게 보이지? 언어학자들도 코카서스나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에 분명 인도와 유럽을 이어주는 민족이 있었을텐데
왜 비어있을까. 저기가 비어있고서 왜 인도어가 유럽과 같은 어족을 보일까 궁금해 했었지.
그런데 흐로즈니가 히타이트어가 인도-유럽계임을 밝히면서 이 퍼즐이 풀리는거야.
흐로즈니는 어떻게 해독을 했나?
nu ninda-an ezzatteni vadar-ma ekutenni
누 닌다-안 에자테니 바다르-마 에쿠테니
당신은 빵을 먹고, 물을 마신다.
그 다음 문장
vadar-ma ekutenni
여기서 Vadar를 영어의 Water. 독일어의 Wasser와 유사하다는것을 알아내고 물 이라고 해석을 하였지.
전의 문장이 음식-먹는다. 형식이었으니 당연히 이 문장도 물-마신다 형식이라 생각하고
Ekutenni를 마신다라고 해석하렸어.
흐로즈니의 2문장 해독을 시작으로
추가로 단어들의 뜻이 해독되기 시작했고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점토판이 해독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고해.
물론 흐로즈니가 아무것도 없는곳에 갓카처럼 나타나서 해독의 열쇠를 밝혀준건 아니야.
그 전부터도 연구가 있었고 몇몇 단어의 뜻과 어족에 대한 가설은 있었어.
하지만 흐로즈니가 알아낸 증거 단어의 수가 많아서 그가 가설을 이론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
최종적으로 2차세계대전 직전 1930년대에는 히타이트에대한 베일이 풀리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문명의 존재가 3천년만에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어.
10. 그래서 히타이트는 어떠한 나라였나?
철의 제국 히타이트. 아시아의 강국 등등 여러가지 수식어가 있지.
한가지 아쉬운건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문명권은 거대한 건축물들이 남아있어서 그 장대함을 느낄수 있는데,
히타이트는 집터, 신전터, 성벽조각밖에는 남은게 없어서
부조물과 기록밖에 시각적으로 보여줄게 없네.
-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인도-유럽어족을 사용한 사람들
- 다신교를 숭배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네샤는 기원전 19세기에 아시리아인들이 아나톨리아에 세운 상업 식민도시인데, 초기 히타이트의 수도로 알려져있어.
아쉽게도 지명은 여러 문화권에서 언급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몰라서 지도에도 NESA가 어디인지는 안나와.
잘파 라는 도시는 흑해로 통하는 어느 강에 위치한 도시였는데
이를 통해 히타이트인들이 흑해지역에서 아나톨리아 중앙으로 이동해왔다는것을 추측할 수 있어.
- 인류 최초로 국제 평화조약을 체결한 나라
카데시 조약이라 불리는 점토판으로
히타이트가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전쟁을 벌일떄 전쟁이 10년이 넘게 지나도록 끝날 기미가 안보이자
양국의 국력 소모를 막기 위해 최초로 평화조약을 맺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어. 원판은 터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데
실제로 보면 10cm가 안되는 되게 작은판이다.
카데시 조약은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이라는 의의와
중동에서의 첫 평화라는 의의로 UN에도 복사판이 걸려있어.
[카데쉬 전투]
총 3개정도 복사판이 발견되었고, 이집트측에도 존재하는 기록이라 다들 상당히 파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잘 보존되어있어.
한가지 특이한건 이집트측에서는 이집트가 전쟁에서 이겼으나 자비롭게 히타이트인들을 해방한다. 라고 되어있고
히타이트 점토판에는 히타이트가 전쟁에서 이겼으나 자비롭게 이집트인들을 놓아준다. 라고 되어있어 ㅋㅋㅋ
하지만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위의 사진처럼 일렬로 오는 이집트군을 히타이트 1군이 전방에서 후퇴하는 척하면서
옆에 매복한 2군 전차부대가 기습하며 히타이트군의 대승으로 끝난게 카데쉬 전투였다고해.
그 조약문 내용중 몇줄을 알아보자면
- 람세스는 히타이트를 침랴가지 않는다.
- 하투실리도 히타이트를 침략하지 않는다.
-조약을 지키는 국가에게는 축복
- 조약을 꺠는 나라에게는 저주
- 동참한 신들의 명단
- 전쟁포로들은 형벌없이 인도한다.
등등
의외로 간단한 내용들이 있지.
- 높은 수준의 법을 갖춘나라
- 고대 중근동과 세계 역사를 변화시킨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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