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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궁시렁 궁시렁

조선 vs 고려 경제력 비교

by 멀리던 2022.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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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언어교과에서 가르치고 있는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은 불과 1만냥을 밑천으로 하여 조선 시장경제를 유린하며 삽시간에 100만냥으로 불린 작중 허생이란 양반을 통해 조선의 유통경제를 조롱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조선은 물류경제가 없다시피한 시대로 인상을 남기고 있다.

 

 반면 교과서나 여러 다큐멘터리에선 고려는 벽란도 - 아라비아 상인들이 왕래하는 - 국제교역항을 가진 번영한 상업경제국으로 이렇듯 고려가 조선보다 이전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더 앞서는 체제를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과연 그랬을까?

 
 
1. 인구 규모 (농업생산성)
 
전근대 국가의 국력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구이다. 이를 지탱하는건 90%이상 농업생산력)이고 즉 농업생산에 의해 유지되는, 또한 노동력으로 환원되는 인구규모는 국가의 경제력에서도 알파이자 오메가가 되는데 우선 고려와 조선의 인구를 비교해 보면,
 
고려 건국 시점 (9세기) : 약 300만명
여말선초 (14세기말) : 약 550만명
 약 83.3% 증가
 
여말선초 (15세기초) : 약 550만명
갑오경장 시점 (19세기 말) : 약 1700만명
 약 208.8% 증가
 
 
비슷한 500여년의 기간동안 조선의 인구증가율이 고려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는데, 전적으로 농업생산량 증가에 힘입었다고 할 수 있다.
 
- 조선전기에 시비법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정전법 과전법의 조세 수취제도의 건전화에 따라 전국토의 개간이 진척되어 인구가 1100~1200만명선으로 고려 멸망당시에 비해 2배 증가한다. 
 
- 뻘짓을 반복했다고 알려져있는 양란후 조선후기에는 이앙법의 전국적인 확산과 견종법을 통해 인구가 추가로 600만명이 추가된다. 또한 기업형 농법인 광작의 시행으로 이제서야 본격적인 빈부격차 - 잉여생산물이 발생했다고 볼수있음.
 
 
 
2. 대중무역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한반도 국가들의 가장 큰 무역상대는 언제나 중국이었음. 그렇다면 고려와 조선은 각각 대중 무역을 얼마나 자주했을까?
 
고려 - 인외마경 헬게이트가 펼쳐지는 원간섭기와 그의 전초전인 무인정권시대를 배제하더라도
 
 
공식 기록상으로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260년여간 총 120여차례, 즉 대략 2년간 1회 무역이 이루어짐.
 
 
조선 - 명, 청 시대 연간 최소 1회 공무역이 존재하였으며, 사무역 또한 빈번히 발생함.
 
 
결국 최대무역 파트너인 중국세력과의 무역의 빈도에서 조선이 고려에 비해 더 빈번함. 비단 무역횟수가 아니라 무역량에서도 조선은 고려를 압도하는데, 
 
 1800년대 청에 수출한 인삼의 액수가 600만냥 선인데 , 이는 17동시기 조선 중앙정부 세금수입 액수인 약 750만냥에 육박하는 액수이다. 최인호의 소설 상도로 유명한 "거상" 임상옥 개인이 거래한 액수만 90만냥에 이르름.  사실 이 시점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한반도에서 gdp에서 지니계수가 절반 아래로 내려가는 유통경제가 시작되는 셈.
 
 
3. 대일무역
 
고려는 사실상 후기 몇년간의 시기를 제외하면 일본과의 교역이 없다시피한 반면, 조선은 일본과 공무역을 유지하였고 (동래)내상을 통해 사무역도 유지하고 있었다.  공무역의 경우 연간 20만냥, 사무역의 경우 연간 4만냥 선으로 무역 규모 자체는 대중무역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
 
 
4. 그 외 지역
 
아라비아 상인이 입항한 기록이 존재하기는 하는데......고려사 500년간 단 3회. 근세이전의 세계에서 사실 상업활동을 위해 배를 띄우는것도 연근항해가 아니면 활발한 활동 자체가 아님. 
 
보통 아라비아 상선단이 송나라의 무역상을 따라 벽란도에 들렀다 돌아갔다고 보는게 주류적인 시각이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아라비아 상인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류큐, 시암, 참파 등 동남아 상인과 무역사절단이 입항하는 기록이 조선왕조 실록의 전반에서 기록되고 있음.
 
 주로 생필품인 쌀과 면포의 수출이 높은데, 즉 중일 이외의 세력과의 무역에서도 조선이 규모상태는 더 앞섰을 가능성이 높음. 
 
 
 
5. 무역에서조차 조선이 고려를 앞서는 이유
 
정말 당연하리만치 당연한 이유인데 근세왕조인 조선의 생산성이 중세 고려의 그것을 아득히 압도하고, 이로 인하여 잉여 생산물이 고려의 그것에 비해 훨씬 많았기 때문.
 
 결국 2차 산업은 1차 산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3차 산업은 1,2차 산업과 밀접한 관련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고려 중기와 조선 중기의 개인당 농업생산성의 격차는 년간 16가마니 : 40가마니의 차이. 또한 같은 땅이라 하더라도 이양법 견종법 이모작이 안되는 고려의 땅이  조선시대의 생산성 절반에 미치지 못함.
 
또한 여기에 영농법의 발달이외에도 목화의 전래에 따른 면포에 의한 경제 혁신도 대단히 크게 작용했다.
 
고려시대 개경의 왕도민들은 끼니를 잇기 위해 모두 교외에 텃밭을 마련했으나, 조선시대 한성인들이 그럴 필요성은 없었음. 도시규모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중앙 경제력의 차이도 존재했다는 이야기. 
 
결국 쌍화점으로 대표되는 벽란도의 이야기는 일부고급품을 지배층에게 향유하게끔 했을지는 모르나, 조선후기와 같이 민생에 본격적인 영향을 끼칠정도로 사회전반을 아우른다고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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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 마치면서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역사교육이 세계사적 동향과 경제사적 관점보다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애국심고취의 몇몇 사례들에만 집착하는게 참 안타깝다.
 
 
역사를 경제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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