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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들 궁시렁 궁시렁

바둑 조훈현 [전투의 왕 그는 누구인가..?] -2

by 멀리던 2020.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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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2편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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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마지막 부분에서 한국으로 떠났던 조훈현은
막상 한국에 돌아와보니 바로 입대를 할 수는 없는 처지였어
영장은 나왔지만 대기기간이 1년이상 돼서
72년도에는 바로 입대를 하지 못해

워낙 어려서 일본으로 떠나서인지 어느새 한국어도 서툴어져 버렸고
오히려 조훈현에게 한국은 낯선 환경이 되어버렸어
일본기원에서 5단까지 승단하고 돌아온 것을
인정받아 한국기원에서도 5단으로 인정해주지

그당시 70년대 한국에서는 이제 막 바둑이 널리 보급되어 
프로바둑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시절이었기에
조훈현은 국내기전에도 참가하게 되는데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못하고 번번히 탈락하는 수모를 당해
일본에서는 승승장구였지만 정작 한국에 와서는 유학의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자
조훈현을 예의주시하던 한국바둑계에서는 싸늘한 시선을 보내게 되지

아마도 갑작스런 스승의 죽음과 낯선 환경, 주위의 큰 기대 때문에
조훈현은 심리적으로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을 거야
결국 조훈현은 그러한 1년간의 힘든 시기를 보내다
이듬해 73년 8월 조훈현은 공군에 자원입대를 하게 돼

기다렸다 육군에 입대를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병역을 해결하고 싶었던 조훈현은 자원입대를 신청한거야

자대에 배치된 후 차민수 初단과 만나게 되는데
차민수는 예전에 S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올인'의 실제 주인공이야
이병헌이 주인공이었던 드라마였지
드라마에서는 아마 바둑에 대한 이야기가 안나왔던 것 같은데
차민수는 사실 국내바둑 프로기사였어

어쨌든 같은 프로기사를 만나게 되었으니 조훈현과 차민수는 친한 친구가 되었지
그렇게 군대에 적응을 하게 되고 어느새 짬이 찬 조훈현은 국내기전에 참가하여
본격적으로 성적을 내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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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국내 최고 타이틀전인 국수(國手)전에서 하찬석 9단을 상대로
타이틀을 빼앗아오게 돼
(국수전은 현재에도 최고 최대의 한국 전통의 타이틀전으로서 국내기전 중 가장 높은 명예를 상징해)

사실 하찬석 9단 또한 15세때 일본 기타니 도장에 들어가 7년간 수학하고 돌아온
바둑천재였어 그런데 그러한 한국 바둑의 최정상을 군인 조훈현이 꺾어버린거지

바야흐로 조훈현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었어
입대전 까지 한국에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던 조훈현이
군인 신분으로 참가한 국수전에서 당당히 타이틀을 거머쥐었으니
한국 바둑계는 술렁일 수 밖에 없었지

다들 조훈현은 끝났다고 생각을 했으니까

그리고 얼마뒤 76년 왕위전에서는 숙명의 동갑내기 라이벌 서봉수 9단을 처음으로 만나게 돼
왕위전의 타이틀을 갖고 있었던 서봉수9단을 상대로 승리하며 왕위전 마저 가져오게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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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수 9단

조훈현 9단을 이야기 하면서 서봉수 9단을 빼놓을 수는 없어
조훈현 9단과 동갑내기 인데다
유학파인 조훈현과는 다르게 스승도 없이 혼자 독학으로 바둑을 배워
바둑을 구사했다는 점에서 조훈현과 대조점을 이루지
때문에 별명으로는 '야전사령관' '된장바둑' '잡초바둑' 등
최초의 한국 정통의 바둑 고수라는 인식이 강해

어찌보면 조훈현보다도 더 대단한 천재라고 할 수 있지만
조훈현에 가려 빛을 많이 못 본 케이스야
스승도 없이 혼자 힘으로 9단의 경지에 이른건 정말 대단한 거지

사실 현재까지 조훈현 9단과의 상대전적은 많이 밀리지만 
중요한 대회 마다 연승가도를 달리던 조훈현 9단의 발목을 붙잡으며
고배를 마시게 했던 천적이자 숙명의 라이벌이야

조훈현 9단과 서봉수 9단은 한국 바둑계의 양대 산맥인데
사실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아
지금도 시니어 기전에서 만나면 대국후에 복기를 하지 않을 정도거든
아무리 작은 대회의 예선 대국이라도 심지어 연습대국에서도 
프로들은 대국후에 복기를 하며 서로서로 바둑에 대해
토의를 하게 되어있어
바둑이란 한 번의 승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연구를 하며 더 좋은 수와 또 더 좋은 수를 찾아가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마저도 하지 않아
얼마전 '한국 바둑의 전설'이라는 이벤트 성 대회가 열리기도 했는데
여기서도 조훈현과 서봉수는 대국 후에 복기를 하지 않고 곧장 대국장을 떠나며
많은 바둑 팬들에게 아쉬움을 줬어

사실 후배 기사들과 팬들의 입장에서 이런 한국 바둑계의 거목 둘이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보기 좋지 않아

어쨌든 본문으로 돌아와서
조훈현은 군 전역 후
76년부터 77년까지 조훈현은 44승 1무 7패로
7개의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31연승이라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한국 바둑계를 평정하게 된다

1978년 조훈현은 한국 바둑계를 평정하고 다시 일본땅으로 건너가
스승 세고에 겐사쿠 9단의 7주기에 참석하기 위해서 였어
일본 바둑계에서는 조훈현이 아주 반가운 인물이었지
그는 한국기원 소속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일본기원 소속의 5단이었으니까

일본기원의 프로기사 5단이 한국 바둑계를 평정해버린건 일본 바둑계의
위상을 간접적으로 높이는 일이었기에 일본 바둑계는 돌아온 조훈현을 위해
기념대국 자리를 마련해
당시 기성전 타이틀 보유자인 스승 후지사와 슈코 9단과의 기념대국 이었어

조훈현은 흔쾌히 승낙했고
결과는 조훈현의 불계승(계산하지 않고 승리한다,상대가 항복을 선언한 것)
친선대국이었지만 일본바둑계는 어느정도 위협을 느꼈던 것 같아
얼마 뒤 일본기원은 고바야시 당시 8단과의 친선대국도
주선했는데 여기서도 조훈현이 불계승을 거두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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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고바야시 고이치 9단 (우) 조치훈 9단
둘은 일본 바둑 계의 숙명의 라이벌이야

당시 후지사와 슈코와 고바야시 당시 8단은 일본의 최정상이었거든
그런데 이 둘이 모두 조훈현에게 무너져 버린거야

후지사와 슈코 9단은 여기서 조훈현에게 군 전역 후에 
왜 곧바로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이야기를 해
그도 그럴것이 이정도 실력이라면 조훈현은 일본에서도 대성을 거두었을 거야
당시에는 3살 아래였던 조치훈이 타이틀을 거머쥐기 시작하며 
일본 바둑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시기였으니까 스승의 입장에서 제자가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활동하는 것이
못마땅했던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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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눈매가 반상을 뚫을듯 아주 매섭다

그러나 다시 한국에 돌아온 조훈현은 79년도에 서봉수 9단이 가지고 있던
명인 타이틀을 제외한 모든 타이틀을 휩쓸었고
최우수기사상,최다연승상,최다승기록상,승률상 등 받을 수 있는 모든 상도 다 받아버려..ㄷㄷ

한국 바둑계는 최강자의 등장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어
누군가 대적할 만한 상대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최정상이라 군림하던 기사들이 전부 상대도 되지 않고
조훈현 앞에서 맥을 못췄으니까

다만 희망은 명인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서봉수 뿐이었어
서봉수만이 조훈현으로부터 유일하게 타이틀을 지켜냈거든

그리고 1980년 조훈현은 미국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당초 본인은 잠시 휴식을 위해 여행을 계획했으나 
결국 미국에 가서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바둑 관련 행사에 줄곧 참석하며 바둑 홍보만 줄창하게 돼

당시 미국에서는 바둑이라는 동양의 보드게임이 한창 붐을 일었는데
주로 체스를 두던 서양인들에게 바둑은 새로운 자극이 되었던 것 같아
그러다 한국의 바둑 챔피언이 미국에 왔다는 것이 미국신문에 보도 되면서
미국 아마추어 16인과 동시에 두는 다면기(한명의 고수가 여러 하수들을 상대로 동시에 바둑을 두는것)도 두고
결과는 15승 1패로 약간 자존심을 구겼다..ㅋㅋ이런건 다 이겨야 본전인데

그리고 유명한 일화가 여기서 탄생하게 되는데
어느날 미국의 체스클럽에 방문하게 된 조훈현에게
클럽관계자가 미국 체스 챔피언과의 체스대결을 권했어
조훈현은 미국에 가기 전까지 체스라는 게임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고
그 날 처음 체스를 보게 되었다고 해
룰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미국 챔피언이 두는 것을 옆에서 몇번 지켜본 뒤
두 판을 두었는데
첫 판은 깔끔하게 조훈현이 패배한다
하지만 곧바로 조훈현은 한 판 더 두자고 제안하고
두번째 판에서 통렬히 미국의 체스 챔피언을 꺾어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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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미국인들은 경악할 수 밖에 없었어
동양에서 온 바둑 챔피언이 갑자기 미국 최고수를 꺾어버렸으니까
당시를 회상하던 조훈현은 
'그저 구경하면서 수를 몇가지 생각해뒀는데 상대가 그대로 두어줘서
쉽게 이길 수 있었다. 그저 운이 좋았다.'라고 밝혀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조훈현은
81년도에도 여전히 그 실력을 과시하는데 그전보다는 승률이 약간 떨어져
그전까지는 80%대를 유지하던 승률이 81년도에는 72%까지 떨어진거지
물론 이것이 나쁜 승률은 아니지만 조훈현의 입장에서 봤을 때의 이야기야
이건 조훈현의 문제가 아니라
라이벌 서봉수의 약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
그때부터는 늘 국내기전의 타이틀전은 조훈현과 서봉수의 차지였으니까

81년도에는 전두환의 제 5공화국이 출범했던 시기인데
정치계 인사들은 당시 일본 최대기전인 명인타이틀을 거머쥐며 일본바둑의 최정상으로
올라선 조치훈과 한국 최고 조훈현의 친선매치를 주선하고자 해
한국에 있었던 조훈현은 정치권의 압력을 이겨낼 수 없었지만
일본에 지내던 조치훈은 정치적인 압력으로 바둑을 둘 수는 없다며
친선경기를 거부하고 말아 그래서 결국 둘의 조우는 뒤로 미뤄질 수 밖에 없었지

그렇게 조훈현은 한국바둑계의 최강자로 우뚝섰고
1984년 
다시 한 번 운명적인 만남이 조훈현을 찾아오게 된다












그것은 바로 내제자 '이창호'와의 첫만남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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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9단

이창호 9단 역시 조훈현 9단의 인생을 이야기 하는데
빠질 수 없는 인물 중에 한명이야
조훈현이 키워낸 유일한 제자이면서 세계 최강 조훈현의 자리를 이어받은
한국 바둑계의 가장 위대한 프로기사이니까
나는 사실 조훈현-이창호-이세돌로 이어지는 세계 최강의 명맥을 잇는
기사들 중에 이창호가 최고라고 생각해

조훈현과 이세돌은 스타일이 어느정도 비슷한데
전투를 통해 난전을 즐기면서도 빠르게 두고 행마또한 경쾌하고 빠르지
하지만 이창호는 정반대야 두텁게 두고 오래 생각하며 싸움을 즐기지 않아
물론 싸움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되도록이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쪽을 택해
상성상 이창호의 스타일은 조훈현과 이세돌의 스타일에 유리하다고 볼 수 있어
전성기 시절 임팩트도 그렇고 전성기의 조훈현을 내리막으로 걷게 만든 것도 이창호였고
이세돌의 무서운 성장을 늦추며 꿋꿋이 정상을 지켜왔던 것도 이창호였기 때문이야

무려 15년 동안이나 세계 최고 자리를 지켜냈으니
이정도면 조훈현이 제자 하나는 기똥차게 키워냈다고 할 수 있지
조훈현의 최대업적이 이창호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야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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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九단


어쨌든 84년 당시 
초등학교 3학년(10세)이었던 이창호를 만나게 된 조훈현은
두점 접바둑을 두게 되는데
전영선 당시 7단을 통해 전주에서 금은방을 하던 이창호의 아버지 이재룡씨가 조훈현 9단에게
아들을 제자로 받아달라는 부탁을 하게 돼
하지만 조훈현은 그당시 제자를 받아들일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어

보통 제자를 들인다는 것은 어느정도 일가를 이룬 뒤에
본인의 입신양명 보다는 후학의 양성에 매진하는 황혼기에나 할법한 일이니까
최정상 바둑기사로서 바쁜 삶을 살아가던 조훈현에게는 무리였던 것이지

하지만 전영선 7단은 조훈현 9단에게 정말 간곡히 부탁을 해
자신이 기본은 가르쳤으나 이 아이의 기재를 모두 감당해낼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반드시 조훈현 9단이어야 한다고 제발 받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거야

조훈현은 이창호와의 지도대국에서
이창호의 기재를 어느정도 파악했기 때문에 이말에 수긍을 했던 것 같아
 하지만 이창호는 조훈현과 같은 이른 시기부터 빛을 발한
천재형의 기사는 아니었다고 해
분명 소년의 바둑에서는 힘이 느껴졌지만 뛰어난 총기가 느껴지진 않았어

대신 어린 아이 답지 않은 진중함과 무게감이 느껴졌다고 해
그리고 당시 조훈현의 아내인 정미화씨는 이창호를 들이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고 한다
그럴 것이 신혼집에 서로 간에 아이도 없는 마당에 초등학생 아이를 맡아 키워야 한다는 것이
젊은 새댁 입장에서 큰 부담이었을테고
남편의 일에 방해가 될까 우려가 컸을테지

나중에 이창호가 성장해서 스승인 조훈현의 타이틀을 죄다 빼앗아 갈때마다
조훈현의 아내는 이창호가 죽일듯이 미웠다고 해
대국이 있는 날이면 이창호를 차로 태워 대국장까지 직접 바래다 주었는데
자기 손으로 키운 자식 같은 아이가 자기 남편의 앞날을 번번히 가로 막는 걸 보고
가슴이 찢어 졌다네
어느정도 그 마음이 이해는 갈 것 같아

결국 고심끝에 조훈현은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아마도 조훈현은
이창호의 아버지 이재룡과 전영선의 모습에서
과거 조훈현을 의탁하던 아버지 조규상의 모습을 보았고
이창호를 보며 어린시절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싶어
결국 자신도 무일푼에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으나
세고에 겐사쿠 9단과 후지사와 슈코9단을 만나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으니 그 재능을 이제는
나누어야 겠다고 생각했을 거야

이 결정은 곧 한국 바둑계의 큰 이슈가 된다
지금으로 따지면 메시가 제자를 들인 느낌이랄까..?ㅋㅋ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 했어 도대체 왜
그것도 이 타이밍에 제자를 들였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한창 왕성한 활동을 해야 할 시기인데 제자를 들이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것이었어

그무렵
조훈현은 화곡동에 집을 얻어 살고 있었는데
알다시피 조훈현은 흙수저 출신이었기에 자신이 상금으로 벌어온 돈 말고는
집에 돈이 있을리 만무했고 화곡동의 국민주택에 살고있었어
조훈현의 부모님 두분을 모시며 아내 그리고 제자로 들어온 
이창호까지 함께 살기엔 너무 집이 좁아
큰 맘 먹고 연희동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연희동은 그당시 돈 깨나 쓴다는 부자들이 사는 부자동네 였거든
때문에 조훈현이 상금으로 많은 돈을 번 것은 사실이지만
이창호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과 맞물려
이창호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았어
전주 부호의 아들이다
조훈현에게 막대한 돈을 주고 제자로 들어갔다
정치권의 줄이 있다 등등
안좋은 소문이 무성했지
하지만 어린 나이의 이창호는 이런 소문들을 알리가 없었고
조훈현의 집에서 수학하며 바둑 실력을 쌓아가게 된다

알다시피 이창호는 어린시절 바둑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할줄을 몰랐다고 해
심지어 혼자 세수도 제대로 못하고 비누거품을 묻혀 그냥 나오기 일쑤였고
초등학생인데도 신발끈도 제대로 묶을 줄을 몰라 매일 끈이 있는 신발은 끈을 밟아
끈이 전부 해져버렸다고 해
그래서 결국 조훈현의 아내는 끈이있는 운동화는 사주지 않고
늘 찍찍이가 달린 운동화만을 신겼다고 하지ㅋㅋㅋ
공부도 그냥 평범했고 오직 바둑만 두고 바둑만 좋아하는 과묵한 아이였다고 한다

연희동 입성 2년 차에 이창호는 만 11세의 나이로 입단대회를 통과하게 돼
스승보다는 느리지만 11세도 엄청나게 빠른 페이스야
본격적으로 프로무대에 발을 담게 된 것이지
과연 조훈현은 이때 이창호가 지금처럼 크게 성장할 것을 예측했을까?
아마 못 했겠지 이창호는 총명하고 튀는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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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또다른 전설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 후 1985년 조훈현은 다시 한번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당시 중국의 최강자 였던 불세출의 바둑천재 녜웨이핑과의 일전을 위해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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녜웨이핑 9단


생긴건 이래뵈도 중국에서는 아직도 역대 최강자 하면 이름이 빠지지 않는
최고수 중의 고수다
조훈현과는 동시대에 활약했고 후에 언급할 
조훈현의 일생 최대 도전이었던 '제 1회 응씨배'결승전의 상대이다

어쨌든 85년도 까지는 바둑은 국가별로 프로기사 제도를 운영할 뿐 서로
만날 수 있는 국제기전은 전무했다
물론 친선경기로서 경기가 열린 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세계대회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바둑팬들은 서로 제 나라의 최강자가 세계최강이라고 변론하기 바빴다

아무튼 미국에서 만난 조훈현과 녜웨이핑은
첫 날 조훈현이 백을 들고 시원한 불계승을 거두며 기세를 세웠지만
다음날 흑 불계패를 당하며 승부는 1승1패로 균형이 맞았다

조훈현은 2판의 대국 후에
'녜웨이핑의 완력은 실로 대단했습니다'라고 소감을 밝히며
녜웨이핑을 인정해주었어
하지만 다음에 만나면 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 또한 엿보였지

이 친선경기 후에 곧바로 85년도 부터 중일슈퍼대항전이라는 교류전이 생겨난다
이 곳에서 녜웨이핑은 '철의 수문장'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일본의 고수를 홀로 연파해
1회 대회 부터 3회로 이어지기 까지 11연승을 거두며 단 한판도 지지 않고 일본의 대표 기사들을
모조리 꺾어버린다
중국에서는 드디어  중국바둑이 일본을 넘어 세계 최강으로 우뚝 섰다고
대서특필을 하게 되지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가 얼마나 저평가 되어있었는지는 교류전에
우리나라가 애초에 빠져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어
한,중,일 중에 한국은 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조훈현 말고는 별볼일 없다는 인식이 세계적으로 팽배해 있었거든

때문에 이를 지켜보며 조훈현과 한국 바둑계의 자존심이 많은 상처를 입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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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88년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이 때
이창호가 프로입단 뒤 처음으로 스승 조훈현의 최고위 타이틀전 도전자로 올라서게 된다
조훈현은 제자의 빠른 성장이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다른 중견기사들이 이창호에게 맥을 못추고 무너졌다는 것에 씁쓸하기도 했을 거야
한국 바둑의 선수층이 이만큼 얇다는 반증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이창호는 조훈현을 넘어서진 못했어
이창호는 조훈현에게 패배하게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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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둑을 사랑했던 대만출신 중국의 성공적인 사업가 잉창치는
자신의 이름을 딴 바둑대회를 이듬해 개최할 것을 공표했고
이건 첫 세계 바둑대회가 탄생하게 됨을 알리는 것이었다
(물론 잉창치의 발표를 보고 위기를 느낀 일본이 다른 나라에 첫 세계대회의 타이틀을 빼앗기는 일은
있을 수 없다하여 88년도에 급조하듯 만든 대회가 바로 후지쯔배)




그리고 대망의 1989년

중국 북경의 샹그리라 호텔에서 열린
우승상금 40만 달러, 총액 100만달러 규모의 바둑 올림픽!
'잉창치 배 세계 바둑 선수권대회'(이하 응씨배)가 열리게 되는데
우리나라에는 출전 시드가 한 장이 배정이 돼

일본과 중국은 대여섯명씩 출전한 것에 비하면
한국을 대놓고 무시한 처사라 할 수 있지
이에 한국기원 측은 주최측에 엄청난 항의를 했지만
주최측은 꼬우면 불참하세요 하면서 그냥 씹어버렸다;;
결국 한국 대표로 조훈현은 이 제 1회 응씨배에 출전하게 되고
조치훈 또한 출전하지만 일본기원 소속이었기에 공식적으로는 일본대표이다 
조치훈은 8강에서 중국의 강호 녜웨이핑을 만나 패배하고 말아
그리고 녜웨이핑은 4강에서 조훈현의 스승인 후지사와 슈코를 연달아 제압하고 결승에 오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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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조훈현은 
16강에서 중국의 왕밍완, 8강에선 일본의 고바야시 고이치, 
4강에서 일본의 린 하이펑 등을 차례로 꺾으며 결승에 올랐어

그리고 결국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망의 결승전

중국의 최강자와 한국의 최강자가 다시 한번 맞붙게 되었지
지금까지 상대전적은 미국에서의 친선 경기 1승1패로
누구의 우위도 점할 수 없는 호각이었어
하지만 외신들은 녜웨이핑의 압승을 예상했지

그동안 최강으로 군림했던 일본바둑계를 단신으로 제압한 녜웨이핑이었고
중국에서 열리는 세계대회이니만큼 홈그라운드의 이점또한 있었으니까
당연히 녜웨이핑의 우승이 예상됐어
조훈현은 예상을 깨고 결승전에 올랐다는 것 만으로도 대단한 업적이라고
무시하기 바빴지

이러한 악조건 속에 조훈현 9단은 결승전 제 1국에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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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담배.. 캬


90년 이전에는
대국중에 담배를 피우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조훈현은 지금은 담배를 끊었지만 10년전까지만 해도 소문난 애연가였고 대국중에 늘 담배를 태웠어
젊었을 때는 하루에 세갑씩 폈다니까 ㄷㄷ하노...
이창호가 어린시절을 회상할 때 스승님의 모습은 기다란 언제나 기다란 장미담배를
들고 담배를 피우시는 모습이 생각난다고 했던 것이 기억나네
연희동 자택의 지하에는 장미 담배 수백보루가 쌓여있었다고 해ㅋㅋㅋㅋ


아무튼 제 1국은
중국의 항저우에서 열렸다
그전까지의 대국은 모두 북경의 샹그리라 호텔에서 열렸지만
결승전부터는 대국 장소를 옮긴다는 것이었다
첫 세계대회였던지라 준비도 미흡했고 결승전을 어느나라에서 둘것이냐를 두고도
한국기원과 주최측과 마찰이 있었고 아무튼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다

1국에서 백을 잡은 조훈현은 특유의 빠른 행마로 상대를 어지럽게 했다
하지만 녜웨이핑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고수였으므로 쉽게 무너지진 않았다
조훈현이 특유의 행마로 난전을 유도했으나 녜웨이핑은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바둑을 두어갔다
접전의 접전끝에 결과는


'조훈현의 3집 승'

첫 대결을 기분좋게 승리로 시작한 조훈현은
타국에서 큰 부담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한편 큰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던 녜웨이핑은 어이없이 첫판을 내주자
망연자실한 모습이 역력했고
녜웨이핑의 압도적 승리를 점치던 외신들의 분위기도 싸늘해졌다

한국을 무시하던 중국을 상대로 보기좋게 한방을 먹이고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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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망의 제 2국

2국도 쉽게 끝나진 않았다 하지만
전 날의 패배에 절치부심한 녜웨이핑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조훈현이 패배하고 말았다
이로써 승부는 1:1 다시 원점
또다시 승부는 예측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제 3국은 3일을 휴식한 뒤 이어졌다

5판 3선승 제의 5번기에서
1승1패로 동률을 이룬 상황
조훈현과 녜웨이핑 서로 물러날 수 없는 승부였다
승부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있는 3국에서 조훈현은 3집 패배를 당한다
1국의 승리를 대서특필했던 한국의 기자들은 어찌할 줄 몰랐고
조훈현 또한 승부의 벼랑 끝까지 몰리게 된 상황에 괴로웠다




그리고 4국이 벌어지기 전 전야제에서 녜웨이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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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이 주최한 세계 최대의 대회에서 중국인이 우승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목표는 우승컵이다'
라는 당찬 소감을 밝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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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열세에 몰렸지만 한국 팬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5국까지 갈 수 있도록 두겠다'
라며 각오를 불태웠어


그리고 이어진 제 4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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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번을 쥔 조훈현은 2국의 초반 양상과 똑같은 포석을 두었다
2국은 조훈현이 패배했던 대국...
지켜보던 사람들은 패배한 바둑을 다시 들고 나왔다며 조훈현의 행동을
의아해 했지만 조훈현은 묵묵히 자신의 바둑에 집중했다
15수째 까지는 2국과 똑같이 두어갔지만
먼저 바둑을 비튼 것은 조훈현이었어
진 바둑을 똑같이 가지고 나올리가 없었던 거지
하지만 녜웨이핑은 강했고 바둑 내내 반상을 주도했던 것은 녜웨이핑...
결국 바둑은 다시한번 계가까지 가서야 끝이 났는데
흑의 한집 승...

결과는

'조훈현의 한집승'이었다!!

승부는 다시 2:2로 원점으로 돌아갔고 조훈현의
각오대로 결승국까지 가게 되었다

오히려 기세로 수세에 몰린 것은 녜웨이핑 쪽이었다
상대가 이렇게 까지 자신을 몰아붙일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녜웨이핑은 당황하고 있었다

결국 대망의 제 5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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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은 한번 더 2국과 4국의 포석과 같은 포석을 들고 나왔다
초반 전략은 귀의 실리를 단단히 챙겨나가는 것
한번은 승리를 했고 한번은 패배를 했던 작전을 한 번 더 들고나온다는것은
사실 생각하기 힘든 수였지만 녜웨이핑은 이정도에 당황할 상대가 아니었고
승부는 오히려 녜웨이핑에 기우는듯 했다

조훈현이 초읽기에 먼저 몰려버린 거야
바둑은 각자에게 몇시간씩 자율적으로 쓸 수 있는 생각시간을 주고
그다음 초읽기를 주게 되어있는데
앞에 주어진 시간을 모두 쓰게되면 초읽기가 시작이 되고 이 초안에
다음 수를 두지 못하면 지게 되는거야

한마디로 조훈현이 먼저 시간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는거지
이건 전적으로 녜웨이핑의 전략이었어
녜웨이핑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묘한 수들을 들고 나왔고 조훈현이 오랫동안 생각할 수 밖에
없게끔 판을 이끌어 나갔거든

하지만 조훈현은 속기라면 자신이 있었지
초읽기에 먼저 몰렸지만 조훈현은 흔들림이 없었어
오히려 상대를 매섭게 몰아붙였고 열세로 보이던 판도가 다시 조훈현에게로 돌아서는 듯 했다
두텁게 두어가며 흑을 몰아붙이던 녜웨이핑의 백은
어느새 자신의 대마가 흑에 봉쇄당하며 대마가 위태로운 상태가 되었고

결국 145수 만에 패배를 시인하며
녜웨이핑은 무릎을 꿇고 만다
조훈현은 5국을 흑 불계승으로 마무리하게 돼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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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세계 최대 규모의 바둑 선수권 대회를
당당히 우승하고 돌아온 조훈현은 당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나 가능했던
카퍼레이드를 받으며 금의환향하게 돼
정말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수준이었다고 해
이때는 바둑 인기가 엄청날 때 였으니까 말이야










여기까지가 2편인데....1편보다 한 두배정도 분량은 되는것같다


다음편이 마지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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