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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궁시렁 궁시렁

2차 세계대전 "벌지 전투"에 대해 알아보자

by 멀리던 2020.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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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 

혹은 '아르덴 공세(Ardennes Offensive)'라고 불리는 이 전투가 바로 사람들이 드라마에서 본 바스토뉴 공방전이야


자 그럼 벌지전투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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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지 전투는 1944년

미국의 장군 '오마 블래들리(Omar Nelson Bradley)'와 

독일 육군 원수 '발터 모델(Otto Moritz Walter Model)'이 맞붙은 사건이야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승승장구한 연합군은

독일을 향해 진군해왔고 마침내 독일 본토를 코앞에 두고 있었지

연합군은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지만

독일군은 거기에 협력해 줄 마음이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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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오마 브래들리' 오른쪽은 '발터 모델'이야


아돌프 히틀러는 막판에 전쟁의 판도를 뒤바꿔 줄 필사의 작전을 꾀하는데

작전의 지휘관으로 그가 고른 장군은 앞서 말한 육군 원수 발터 모델이었지

모델은 히틀러의 '소방수'로 불렸던 유능하고 강인한 지휘관이야

그는 적군은 물론이고 수하의 지휘관 및 참모들에게도 무자비했는데 덕분인지 인기가 없었고 병사들은 그를 '사병(Dead Man)'들의 장군이라 불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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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맨 위에 'Antwerp' 보이냐?


히틀러의 계획은 아르덴 숲의 미군 전선을 뚫고 빠른 탱크로 밀고 올라가 '뫼즈(Meuse)'강 너머를 점령하는 것이었는데

그 마지막 목적지는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엔트워프(Antwerp)'였지

그는 엔트워프를 탈환하면 서부전선 북쪽의 연합군을 포위공격하여 괴멸시킬 수 있을거라 믿었어 

하지만 당시 독일은 그럴만한 군사력이 없었지

이런 상황을 알고있던 모델은 이를 무모한 작전이라 판단했어

그는 이 작전 대신 기갑부대를 나눠 아르덴 북쪽과 남쪽으로 우회시킨 뒤 미군을 포위하자고 설득했지만 히틀러는 고집을 부렸지


"그냥 엔트워프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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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은 힘든 전투가 될 것이라 직감했어

연합군에겐 우수한 공군력이 있었기에 이를 피하려면 날씨가 계속 좋지 않아야 했고

그의 군대는 4일 만에 뫼즈 강까지 돌파해야 했으므로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했지

하지만 무엇보다 기습공격이 가장 중요한 전투의 필수요소였어


연합군은 독일군이 아르덴에서 공격해 올 거라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이유인 즉 아르덴의 빽빽한 숲 덕분에 여길 지나려면 독일 탱크들은 길게 줄지어 좁은 통로를 지나야했기 때문이야

좁은 길목에선 선두의 탱크 한 대만 멈춰서도 부대 전체의 앞길이 막혀버리니까

무방비로 노출되어 공격받기 딱! 좋았던 거지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25만의 독일군을 기습 투입해야 했던 모델에게 있어 이 작전은 모험에 가까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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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실제 겨울의 아르덴 숲임


모델을 상대했던 미국의 장군은 오마 브래들리였어

브래들리는 화를 잘 내고 예민했으며 자신감이 없는 편이었대

게다가 그는 직접적인 전투 경험이 별로 없었어 

처음 전투에 투입된게 1년 전인 1943년 시칠리아였거든

당시 브래들리는 신병 훈련과 지친 병사들의 휴식 목적으로 아르덴 숲을 이용하고 있었어

앞서 말했듯이 연합군은 아르덴에서 공격받을거라 전혀 생각지 못했지


1944년 12월 15일 저녁

미군은 영화배우 '마를린 디트리히(Marlene Djetrich)'의 공연을 보고 있었지만

바로 옆의 독일군은 새벽의 기습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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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인 16일 새벽 5시 30분

드디어 독일군이 아르덴 공격을 개시했어

미국 병사들은 영문도 모른채 당하고 말았지

크리스마스를 몇일 앞 둔 그들에게 독일군의 기습은 날벼락 같았어


아르덴 기습돌파가 시작되고

독일군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승리를 거뒀어

미군은 큰 혼란에 빠졌지


'주머니'를 뜻하는 'Bulge'라는 이름은 이때 독일군의 진격에 의해 전선의 일부가 돌출된 모양에서 유래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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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부분이 독일군이 진격한 지역들이야 어때 주머니 같냐?


독일군이 미군 전선을 무너뜨릴 때

브래들리 장군은 파리에서 옛 친구이자 상관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의 진급을 축하하고 있었어  

브래들리는 독일군이 기습공격해 온 걸 알고 있었지만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지

그저 산발적인 반격 중 하나라고 치부했던거야

때문에 소식을 듣고 24시간이 지난 17일 오후에야 본부로 돌아왔어

당시 아이젠하워도 이 소식을 전해듣는데

그는 브래들리와 달리 이를 심상찮게 여기고 기갑 부대를 북쪽과 남쪽에 하나씩 파견하여 유사시 돌출된 독일군 전선의 측면을 공격하라고 지시했지


남쪽 기갑 부대의 지휘관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조지 패튼(George Smith Patton Jr)' 장군이었어

입에 욕을 달고 살고 총을 두개씩 갖고 다녔던 패튼은 브래들리완 정반대 성격의 소유자였지

덕분에 브래들리는 패튼을 정말 싫어했다고 해

브래들리는 패튼이 전투에 끼어드는게 싫어서 후에 위급한 상황임을 파악하고도 원조를 요청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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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조지 패튼' 장군


브래들리의 부대는 몇가지 큰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참호족(Trench Foot)'이었어

참호족은 추위와 습기가 발의 혈액순환을 막으면서 발병하는데 치료않고 그대로 방치하면 괴사하는 병이야

당시 미군들의 군화는 눈에 취약했기 때문에 참호족에 걸리기 쉬웠대

밴드 오브 브라더스 '조 토이' 기억나는 사람 있니?

바스토뉴에서 조 토이가 참호족에 걸렸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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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참호족보다 더 위협적이었던 건 미군으로 위장한 독일 특수 부대였지

완벽히 영어를 구사했던 400명의 독일 특수 부대원들은 미군복을 입고 포로나 전사자의 인식표를 달았어

그들은 탱크까지 위장했는데 페인트칠한 합판을 독일 탱크 겉에 붙였지

전선 후방으로 이동한 그들은 길의 이정표를 바꿔가며 미군의 혼란을 조장했어

또한 미 장군들을 공포에 떨게 했는데

그들의 주요 임무가 미 장군 암살이었기 때문이지


한편 선봉 부대였던 독일군 최정예 기갑 부대는 계속해서 진격해 나갔어

그들의 지휘관은 악명높은 나치 대령 29세의 '요하임 파이퍼(Joachim Peiper)'였지

파이퍼는 날씨가 개어 연합군 폭격기가 가세하기 전에 뫼즈 강까지 가야했어

뒤따라오는 지원 부대가 지나갈 길을 열기 위해서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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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임 파이퍼 잘생겼넹,,


1944년 12월 17일

파이퍼의 기갑 부대는 '말메디(Malmedy)' 마을에 도착하는데 

여기서 후퇴하는 미군 수송차대를 생포하게 돼

잔혹하게도 파이퍼는 잡은 113명의 포로 중 88명을 즉시 총살해버렸지

이 사건은 '말메디 대학살(Malmedy Messacre)'라고 불리며 그의 잔학무도한 업적 중에 하나가 되었어

재밌는건 이 소식을 접한 미군들은 공포에 떨었는데 이 공포가 오히려 살기위한 발악으로 변하면서 역효과를 냈다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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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차린 미군들은 아르덴 중심에 있는 작은 마을로 결집했어

'바스토뉴(Bastogne)'로 말이지

바스토뉴는 아르덴 전역을 잇는 7개 도로의 중심지였어

독일군 원래 목적지 엔트워프 기억나? 

이 마을은 독일군이 서쪽으로 가기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했던 전략적 요충지였지


독일군의 바스토뉴 점령을 막아야 했던 브래들리 장군은 다급했어

바스토뉴엔 소수의 수비대뿐이었거든

그는 바스토뉴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정예 공수부대를 투입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101 공수부대'야

바스토뉴가 독일군에게 포위당하리란 것은 불보듯 뻔했지만 101공수부대원들은 항상 겪던 일이었기에 이번에도 덤덤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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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2월 17일 저녁

101 공수부대원들이 바스토뉴로 가는 동안 시간을 벌기 위해 브래들리의 군대는 마을 주변 도로를 모두 봉쇄했어

그들은 땅을 파고 조용히 독일군 전차를 기다렸지

 

당시 독일의 '타이거(Tiger)' 탱크는 미군들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어

88밀리 포로 무장한 타이거 탱크는 2000m 밖의 적도 제압할 수 있었지만 연합군 측 탱크들은 그렇지 못했지

게다가 타이거 탱크의 장갑판은 100mm나 되는 두께였기에 아무리 포를 쏴대도 뚫을 수가 없었어


이에 대항하여 미군은 '바주카(Bazuka)' 포를 활용했는데

타이거 탱크의 유일한 약점이었던 측면을 노렸어

측면 장갑은 정면과 달리 그 두께가 80mm정도였기 때문에 바주카로 충분히 뚫을 수 있었거든

이런 전략으로 분투한 미군은 결국 바스토뉴 수비를 보강할 시간을 버는데 성공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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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간에 쫒기는 건 모델이었어

선봉대를 이끌었던 요하임 파이퍼 기억나?

앞서나가던 그들은 연료가 바닥나고 있었고 모델이 바스토뉴를 뚫어 보급선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더 이상 진격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

이를 모를 리 없는 모델은 곧장 탱크로 마을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해

브래들리는 101 공수부대원들을 지원할 방법을 모색했지만 마땅치가 않았어

남쪽에 패튼 장군의 부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싫어했던 브래들리는 끝내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지

보다 못한 아이젠하워가 대신 조치를 취하는데 패튼 장군에게 바스토뉴를 구하라는 명을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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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2월 20일

남쪽에 있던 패튼 장군의 부대는 '룩셈부르크(Luxembourg)'를 거쳐 바스토뉴까지 독일군 전선을 뚫으며 긴 여정을 해야 했어

게다가 한치 앞을 모르는 위급한 상황을 고려해서 신속하게 이동해야만 했지

여기서 타이거보다 화력은 약했지만 기동성이 좋았던 미군의 '셔먼(Sherman)' 탱크가 활약하게 돼

셔먼 탱크는 타이거의 절반 무게였기에 빠르면 시속 40km의 속도도 낼 수 있었거든


이때 브래들리는 본부가 있던 남쪽의 '룩셈부르크 시티(Luxembourg City)'에 있었는데 그의 군대는 북쪽 '스타벨로트(Stavelot)'에 있었어

명령을 기다리며 정지해있던 브래들리의 북쪽 부대를 움직이기 위해

아이젠하워는 그 지휘권을 영국의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 장군에게 줘버리지

지휘권을 받은 몽고메리는 패튼과 마찬가지로 군대를 몰아 북쪽에서 바스토뉴 지원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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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원군을 기다리는 바스토뉴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어

미군의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단 걸 꿰뚫은 독일군은 12월 22일 최후 통첩을 보내며 항복을 권유한다

하지만 101 공수사단 지휘관이었던 '앤소니 맥컬리프(Anthony McAuliffe)' 준장은

" Nuts! (미친놈들!) " 

라고 적은 짧은 답장을 보내어 당당히 응수했지


독일의 운이 다한 걸까?

12월 23일 새벽

악천후가 계속되던 하늘은 맑아졌고 마침내 연합군은 공군을 투입한다

수송기는 보급품을 조달하고 전투기는 독일군 진지에 폭탄세례를 퍼부었지


보급품에는 '근접 신관(Proximity Fuze)'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포탄을 공중에서 터지게 하는 장치로 엄폐물도 소용없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신 무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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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 신관과 공군의 공습으로 시달리던 모델은 바스토뉴 탈환이 어려울 것임을 깨닫고 히틀러에게 다시 한번 작전계획 수정을 요청하지 

모델은 최선의 대안을 제안했지만 히틀러는 끝내 바스토뉴 점령을 고집했어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히틀러의 명을 어길 수 없었던 모델은 마지못해 바스토뉴 총공격을 시도한다 

아니나다를까 독일군의 총공세는 끝내 미군에게 저지당하게 돼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다음날인 26일엔 패튼장군의 부대까지 합세하지


대패한 모델은 본국으로 퇴각했어

선봉으로 나가있던 파이퍼도 지원을 와야 할 후방군이 바스토뉴에 집착하고 있으니까 낙담하여 모든 전차를 버리고 걸어서 퇴각했지 

그러나 발터 모델은 유능한 지휘관이었어

그는 퇴각하면서도 강하게 저항했고 연합군에게 큰 손실을 안겨주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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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1월 16일

결국 그의 군대는 한달 전 그들이 출발했던 라인강으로 되돌아오고 말아

그리고 독일군 최고의 기갑 부대와 함께 10만명의 병사를 잃은 발터 모델은 1945년 4월 21일 권총으로 자결해


벌지 전투의 승리로 브래들리 장군은 미국의 영웅이 되었지만

그 역시 8만의 미군을 잃었고 전투 후반부엔 몽고메리와 패튼에게 지휘권을 뺏기면서 손놓고 방관할 수 밖에 없었던 탓에 그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어


벌지 전투 이후 기력을 다한 독일은 이미 패전국이나 다름없었고 

그렇게 연합군은 베를린으로 진격해 전쟁의 종지부를 찍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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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여기까지야





3줄 요약


1. 독일 최후의 반격으로 벌지 전투가 벌어짐

2. 천조국 101 공수부대 전투력 개 ㅆㅅㅌㅊ

3. 히틀러 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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