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이다...
서명인으로 불리는 서봉수9단은 가장 특이한 바둑기사다. 뭐 미생에서도 서봉수는 찬밥신세니까....
바둑이요? 줄 그어진 나무판에 돌 놓는 놀이죠...ㅎㅎ(서봉수, 바둑이 뭐냐는 물음에..)
늦게 배웠고
스승이 없었고
내기바둑으로 공부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오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입단 자체가 늦었다.
그런데도 그는 승부사 기질로 된장바둑이라는 바람을 일으키며 오뚝이처럼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기를 거듭하면서
조훈현의 천하쟁패에 맞서 15년 동안 조서시대(조훈현-서봉수 시대를 줄여말함)를 이끌어 왔다.
조서시대가 마무리되고 4대 천왕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조훈현, 이창호, 유창혁에 밀려 끝자락으로 밀려나는가 싶더니
92년 제 2회 응창기배 국제바둑대회에서 일본의 오다케9단을 이기고 세계정상에 등극하고 또 한동안 지는 해처럼 기울던 그가 96년 진로배 국제기전 9연승의 신화를 만들기도 했다.
특이한 경력의 서봉수,
단백하고 소탈한 성품의 서봉수,
프로기사에다가 타이틀 보유자면서도 자기보다 잘두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찾아가 바둑을 배웠던 서봉수
된장 바둑,
계산을 못하는 바둑기사,
영원한 2인자,
야전사령관 서봉수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서봉수 성장과 입단, 그리고 명인전
2. 조서시대, 불멸의 라이벌 조훈현
3. 서봉수의 마지막 불꽃 응창기배와 진로배
2편) "나의 바둑을 키운건 7할이 조훈현" 운명의 조-서 시대
한국 바둑에서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말까지 대략 15년의 시간을 曺徐 時代(조서시대)라고 부른다.
서봉수는 조서시대를 2인자로 살아오면서 숱한 기록을 남겼는데
1994년 한국기원 프로기사 최초로 1000승 돌파
(조서시대에 수 많은 타이틀을 조훈현이 가지고 있어서
서봉수는 도전기를 두기위해서 수많은 예선을 거쳐야 했고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빨리 최초로 1000승을 돌파하게 된다.
물론 이 기록은 훗날 이창호-조훈현 시대로 들어가서
거꾸로 도전자가 된 조훈현에 의해서 1500승 기록을 돌파당하게 된다….역지사지…입장이 바뀌었네 ㅎㅎㅎ)
1000승 최초 돌파의 의미는 무엇이냐?
조서시대 15년 동안 거의 모든 기전의 우승 다툼,
즉 결승 대국을 조훈현, 서봉수가 두었다는 이야기다.엄청 대단하지 않아?
예를 들어보자
최고의 권위인 국수전을 보자
1976년 최초로 국수가 된 조훈현은 15년 조서시대 동안 9년 연속으로 결승대국을 서봉수하고 대결했다.
(서봉수 vs 조훈현 2승 7패)
국수전에 버금가는 권위인 명인전을 보면
1972년 명인이 된 서봉수는 무려 10번이나 조훈현과 결승대국의 승부를 겨뤘다
( 서봉수 vs 조훈현 3승 7패)
한국기원 사상 최다 결승대국 대결은 바로 서봉수-조훈현 조가 되겠다.
무려 69회의 타이틀전을 치뤘다.
물론 비교하기 부끄럽게도 56번을 조훈현이 우승했고 서봉수는 ‘고작’ 13번 우승했다.
조훈현은 물론이고 서봉수도 조서시대에는 상대방을 제외하고 다른 기사들에게는 좀처럼 패한적이 거의 없었다.
서봉수 vs 조훈현 통산전적은 119승 225패
다시 말하면 세판을 두면 두판은 조훈현이 이기고 한판은 서봉수가 이겼다.
조훈현 “서봉수가 왜 라이벌이냐? 굳이 라이벌이라면 일본에 있는 조치훈이지…”
52년생 동갑내기 조서의첫 만남
75년 공군병이던 짧은머리의 조훈현이 서봉수와 명인전 결승대국을 치루고 있다.
1973년 대한민국은 국보급 기사 조훈현의 귀국으로 들썩였다.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조훈현을 귀국시켰고 원조각하의 특별지시로 기사생활을 할 수 있는 공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당시 이미 명인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서봉수는 프로기사로써의 자존심이나 타이틀 홀더로써의 자부심보다는
자기보다 바둑을 잘 두는 사람 앞에서는 제자처럼 다가가서 한 수 가르침을 부탁했었는데
동갑내기 조훈현과도 이때 한국기원에서 엄청나게 100원짜리 내기바둑을 많이 뒀다.
물론 승패는 조훈현이 일방적으로 이겨서 나중에는 정선으로 두게 되었다.
(이게 정말 쇼킹한 일인데….바둑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알것이다.
뭐랄까…..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친선축구를 하는데 브라질이 한골 접어주고 하는 경우?)
프로로서 자존심도 버리고 서봉수는 정말 바보처럼,
아니면 정말 배우고자하는 열망이 강해서였던지 정선으로 조훈현과 치수를 조정하고 두게되는데….
근데도 승률이 50대 50이었다고 한다…(조훈현 얼마나 강했던거냐…ㅎㄷㄷ )
[조훈현은 100년에 한 명 나올 천재라는 찬사 속에서 9세에 프로가 됐고 최고의 스승 밑에서 배웠다.
서봉수는 늦게 입문해 18세에 프로가 됐고 저잣거리의 내기바둑과 더불어 성장했다.
고수들이 득시글거리는 ‘일본 바둑’이라는 풍요로운 터전에 비하면
서봉수가 자란 대방동 단칸 셋방과 영등포의 기원은 짜장면 냄새 물씬 풍기는 후진 뒷골목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서봉수도 다른 강자들과 마찬가지로 조훈현에게 무수히 패배했다.
그러나 서봉수는 완패하진 않았다. 이 점이 ‘승부사 서봉수’의 다른 점이다.
다른 기사들은 조훈현에게 연패하면 그걸로 포기하고 정신적으로도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서봉수는 조훈현에게 밀려 멀리 시베리아까지 쫓겨갔다가도 어느새 만리장성을 넘어 돌아와
조훈현 왕국의 일각을 매섭게 물어뜯곤 했다.
조훈현이 중원의 ‘황제’라면 그는 배고픈 북방의 몽고족이었다.] (박치문 ‘서봉수 이야기’)
기재로는 서봉수도 조훈현에 뒤지지 않았는데....
만일 서봉수가 바둑의 정규교육/엘리트 코스를 밟았다면 두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잡초류 서봉수 조서시대를 마감하던 즈음의 모습
마치 두 사람은 미생의 등장인물로 보면 장그래(서봉수)와 안영이(조훈현)가 아니었을까?
성격도 조훈현은 머리회전이 빠르고 모든 게임에 능했는데 (카드나 마작에서 조훈현을 이긴 사람이 없다고 하데…)
서봉수는 졸라 모든게 느렸다.
계산에 굼뜨고 서툴러서 도대체 이기 어트께 바둑고수가 된노하고 놀래는 기원관계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엔 아는 게 없었다. 지금 보면 너무 엉터리여서 깜짝 놀라곤 한다.”(서봉수 9단)
1973년 두 사람은 명인전 결승에서 서봉수가 방어자로 조훈현은 도전자로 결승대국을 벌이게 된다.
뭐 이미 접바둑으로도 50대 50의 승부였으니까 조훈현은 자신만만했지만
결과는 서봉수가 3승1패로 타이틀 방어에 성공
이후 명인전을 5년 연속 방어하게 되고 서봉수는 서명인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게 된다.
(조훈현은 조국수, 서봉수는 서명인 나머지 9단들은 전부 사범….아 물론 이창호, 유창혁, 이세돌뺴고)
100짜리 내기바둑으로 조훈현과 싸우는 법을 배운 셈이라고나 할까…
암튼 조훈현은 이미 이때부터 서봉수를 좀 무시하고 싫어라 했다.
특히나 서봉수가 길거리 내기바둑출신이란점
자신과는 다르게 매사가 분명하지 않고 어눌한 점 등등이 맘에 안들었는데
그런 변변치 못한 인사가 자신의 라이벌로 인구에 오르내리니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다…
서봉수 “나는 조훈현에게 바둑을 배웠다”, 조훈현 “나는 서봉수에게 승부를 배웠다”
암튼 이때부터 서서히 시작된 조서 시대는 7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바둑사에서 유명한 ‘조(曺)-서(徐) 시대’다. 팬들은 처음엔 환호했으나 나중엔 “똑 같은 연속극”이라며 불평을 쏟아냈다.
팬들은 장수영·서능욱·강훈·김수장·백성호 등 ‘신흥 5강’을
‘도전 5강’이라 부르며 조-서 대결 구도를 깨고 우승컵을 거머쥐라고 응원했다.
하나 이들은 우선 서봉수에 가로막혔고 천신만고 서봉수를 넘어 조훈현까지 가도 승리한 적은 없다
(서능욱은 무려 13번 준우승했다. 이들 중 강훈만이 1승을 거뒀는데 결승 상대가 조훈현이나 서봉수가 아니었다).
당시에 모든 결승은 운당여관에서 치뤄졌는데 매번 결승대국이 조서 둘만의 잔치가 되어버리자
관심도 시들해져서 어느날은 운당여관이 텅텅빈 채(도전 5강을 포함한 프로기사들이 관전하러 오지 않음)
고요함 속에서 조서 둘만이 대국을 치뤘다고 한다.
운당여관의 결투....
둘의 사이가 얼마나 나빴냐면,
바둑이 끝나 승패가 갈려도 둘은 복기를 전혀 안했다.
뭐 서봉수는 원래 복기를 안 좋아하고
일설에 의하면 기억력도 약해서 자신이 둔 수도 수순을 헷갈려하기때문이라고도 하는데…(믿거나 말거나…)
나머지 프로기사들도 ‘우덜이 들러리냐? 남에 잔치에 왜 구경만 하러가냐….
재미없다 등등” 하면서 외면하는 바람에 이들은 평생 조서를 넘어서지 못하고 말았다고 하겠다.
(둘의 바둑을 끝없이 연구해도 이길까 말까한데…..)
조서시대에 운당여관에서 둘이 바둑을 둘때면 신경전도 대단했는데
장미담배를 애용하던 조훈현은 혼잣말을 시도때도 없이 던지고 어쩔때는 콧노래도 흥얼거리면서 상대를 자극했다.
이에 서봉수가 “아…여기가 무슨 가라오케야…참내..” 혼잣말을 던졌는데
얼굴이 시뻘게진 조훈현이 세수하고 돌아와서는 입을 꾹 다물고는 한참 만에 독수를 둬서 그대로 서봉수를 개박살낸적도 있다고 하고….
서봉수가 한수 두고 조훈현 차례를 기다리면 선데이서울-당시 유명잡지-을 읽다가…
“수영복사진은 집에 가서나 흘깃대지…참…”하는 조훈현의 혼잣말에
서명인이 거꾸로 얼굴이 뻘개져서 조훈현의 대마를 다 잡아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ㅋㅋ
이렇게 조서시대는 둘만의 독무대로 80년대를 마감하게 된다.
3편 예고)
시들어진 서봉수
이창호-조훈현 시대에 4대 천왕 끝자락으로 밀려나
그러나 국제기전에서 마지막 불꽃을 피우며 부활
응창기배 우승(최고권위의 국제 바둑대회)
진로배 9연승
3줄 요약)
1. 1973년 조훈현 귀국 ,둘의 첫만남부터 실력 차 졸라 넘사벽….
2. 서봉수의 내기바둑으로 실력차 줄임
3. 조훈현의 독주를 간간히 막아냄으로써 조서시대를 만들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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