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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들 궁시렁 궁시렁

"잡초류"서봉수 명인에 대해 알아보자 -1편- (바둑계의 돌연변이)

by 멀리던 2022.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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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류 서봉수,

우리나라 프로기사 291명 중 한 명이고

현재 랭킹은 97 (국내 순위다 참고: 조훈현 71위 유창혁 75위 이창호 28)

 

 

서명인으로 불리는 서봉수9단은 가장 특이한 바둑기사다. 뭐 미생에서도 서봉수는 찬밥신세니까....

 

늦게 배웠고

스승이 없었고

내기바둑으로 공부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오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입단 자체가 늦었다.

 

그런데도 그는 승부사 기질로 된장바둑이라는 바람을 일으키며 오뚝이처럼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기를 거듭하면서 

조훈현의 천하쟁패에 맞서 15년 동안 조서시대(조훈현-서봉수 시대를 줄여말함)를 이끌어 왔다.

조서시대가 마무리되고 4대 천왕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조훈현, 이창호, 유창혁에 밀려 끝자락으로 밀려나는가 싶더니 

92년 제 2회 응창기배 국제바둑대회에서 일본의 오다케9단을 이기고 세계정상에 등극하고 또 한동안 지는 해처럼 기울던 그가 96년 진로배 국제기전 9연승의 신화를 만들기도 했다.

 

특이한 경력의 서봉수

단백하고 소탈한 성품의 서봉수

프로기사에다가 타이틀 보유자면서도 자기보다 잘두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찾아가 바둑을 배웠던 서봉수

된장 바둑

계산을 못하는 바둑기사

영원한 2인자

야전사령관 서봉수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서봉수 성장과 입단, 그리고 명인전

2.     조서시대, 불멸의 라이벌 조훈현

3.     서봉수의 마지막 불꽃 응창기배와 진로배

 

 

 

 

 

 

1편 서봉수 성장과 입단 

 

서봉수는 누구인가?

1952년 한국전쟁 중에 대전에서 태어남 (부모님 동난의 와중에서 힘쓰심)

유소년기를 거치면서 학교 가기 졸라 싫어함 고등학교 졸업장도 출석일수가 모자라서 어머니가 학교에 사정사정하면서 얻어옴. (특히 수학을 죽어라 싫어했다고 함; 지금도 상금계산을 종이에 일일이 펜으로 쓰면서 합산하는 성격임_계산기 없이 암것도 못함 ㅋㅋ)

 

 

(1972년 명인전 우승으로 비유학파 최초의 우승자가 되고 국민남동생 되버림)

 

 

열다섯 무렵에 동네 기원에 아버지 심부름 갔다가 어깨너머로 바둑을 배움.

이때부터 독학으로 바둑공부 시작 (말이 독학이지 그냥 길거리 바둑)

뭐 책보는 것을 워낙 멀리했기에 기보 연구나 전문서적으로 공부한게 아니라 무조건 아무하고나 많이 둠

그래서 자기보다 잘 두는 사람이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바둑을 둠 그리고 얼마 있다가 이겨버림.

 

프로기사가 되려는 사람들이 절대로 금기시하는 내기바둑을 통해서 성장함

(졸라 특이한 경력- 조훈현은 기타니 문하에서 내기바둑 딱 한번 뒀다가 쫓겨났었다ㅎㄷㄷ

내기 바둑을 두면 소소한 승리를 위해 꼼수를 연발하고 깊이 있는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유단자들이 금기시함

특히 바둑을 배우는 유소년 청소년기에 돈맛에 빠지면 심성에도 좋을게 없다고 배척하는데….

서봉수에게는 길거리 내기바둑이 생계의 수단 이었음.

 

이렇게 동네기원에서 내기바둑 두면서 더 이상 상대가 없어지자 바둑배운지 1년 만에 전국 고교대표로 선발됨 

그리고 1970년 열여덟 늦은 나이에 프로기사가 됨. 이게

프로기사로 대성하려면 7~9세 때는 바둑을 배워야 하고 11~13세쯤엔 프로 입단을 해내야 하는게 보통.

최소한 15세 이전엔 프로가 돼야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

조훈현은 5세 때 바둑을 배웠고 9세에 프로가 됐다. 일본에서 최고의 스승들에게 배웠다

이창호는 8세에 바둑을 배웠고 조훈현의 제자가 되어 11세에 프로가 됐다

이세돌은 권갑룡 도장에서 바둑을 공부해 12세에 프로가 됐다

이에 비하면 서봉수는 너무도 늦게 바둑을 배운 셈이다. 

 

근데 웃긴 게  입단할 때 까지도 바둑의 바이블 현현기경 조차도 공부를 안했다는것.

일부러 안한게 아니라 그런 책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입단 한거…..

(헌법안읽고 고시패스한거랑 마찬가지?)

나중에 입단하고 한참 후에 ", 이런 좋은 책이 있었구나!" 하면서 탄식했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이때도 재능 자체는 천재적이라, 정석을 모르던 서봉수에게 아주 어려운 정석을 시험삼아 풀어보라고 줘보자 

오랜 시간을 장고하며 끙끙대면서도 하나하나 정확하게 돌을 놓아가기도 했다고.

 

암튼 바둑을 첨 배워서 입단하기까지 걸린 시간으로 보면 엄청 세계 기록감( 3년 밖에 안 걸림)

근데, 입단하고 2년도 안되서 바둑계의 거목 조남철과 명인전 도전기를 벌임(조남철 타이틀 방어, 서봉수가 도전자)

이 당시만 해도 승단이 매우 엄격해서 프로기사들끼리 승단대국을 통해서 승단하던 때라 

조남철은 8단 이었고 그때까지 9단이 없었음- 서봉수는 당연히 초단 이었음. (서봉수는 나중에 조서시대에도 7단이었음)

 

 

1972년 조남철 8단과 명인전 도전기를 벌이고 있는 서봉수 2단

 

인전 도전자 결정전을 하면서 승단전에 연승하는 바람에 2단이 됨.

그리고 조남철 8단 명인전 승부를 벌이는데 31패로 발라 버림.

당시 한국 바둑은 조남철의 시대가 김인으로 교체되는 시기였지만 조남철은 여전한 강자였는데…..

그는 패배를 너무나 챙피해한거….”아 봉수가 3단 되었어도 이렇게 쪽팔리지는 않았을텐데…”라는 명대사를 남기심.

 

입단한지 18개월만에 첫 우승을 하는 기록을 세우게되고 (아직까지도 안깨지는 기록

신문에 대서특필됨..

특히나

당시까지 우승자들은 전부 일본 유학파 (조남철, 김인, 윤기현, 하찬석 모두가 일본에서 바둑배워옴)였는데 

어디서 듣보잡이 선생도 없이 바둑을 스스로 깨쳐서 우승하니까 난리가 난거임.

 

국민적인 인기도 폭발하는데 (토종바둑, 된장바둑, 자존심 운운하면서….) 

그러나 바둑계에서는 별 대수롭지 않게 봄, 그냥 기재는 있는데 안타까운 수준으로 대부분 봤었슴 

또한 명인전 우승을 운빨이 좋았다고 바둑계에서는 바라봄….

 

그도 그럴만한게 명인전 우승자가 여기저기서 많이 깨졌슴

여기저기서 많이 패배했기 때문에 무슨 강자로 인식되지는 못했슴

 

 

공군사병 조훈현과 명인전 방어전 대국하는 서봉수 명인 1973년...이떄까지는 아직 조서시대가 올줄 아무도 몰랐슴...

 

 서봉수는 한마디로 ‘밑천’이 짧았슴 

조훈현이 후지사와 슈코 같은 훌륭한 스승 아래서 연구를 하고 그 옛날 본인방 가의 명국에서부터 

우칭위안(오청원), 기타니, 사카다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명국을 섭렵하며 바둑을 충실히 다진 것과 달리 

서봉수는 ‘실전’이 스승이었고 거기서 터득한 동물적인 승부감각과 끈질긴 생존력이 전부였던거

 

서봉수는 이제 막 정글에 발을 디딘 새끼 표범이었다

명인이 되었건만 약한 상대에게도 자주 졌다. “서봉수의 명인은 우연”이란 소리도 나왔다

필생의 적수가 될 ‘조훈현’이 이해에 군입대를 위해서 귀국하게 된다

 

2편으로 이어짐....

 

 

 

 

2편 간단예고)

우쨌든 서봉수는 이 명인전을 5회연속 우승해버리고

서명인이라는 칭호를 얻게됨.

조훈현에게 내기바둑두면서 연창깨짐

조서시대 15년동안 거의 모든기전의 타이틀대국을 두 기사가 두게됨

 

 

 

 

 

 

 

3줄요약)

1. 서봉수 스승없이 독학으로 바둑배움

2. 입단하자 마자 1년반만에 '명인'이 되어버림

3. 조훈현보다 먼저 우승하지만 영원한 2인자가 될 운명이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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