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조선을 망쳤다는 그릇된 편견이 어디서부터 비롯됐나.
일본이 대한 제국을 침략할 때 근대화는 그 원동력이 되었다. 대한 제국은 근대화에 실패해 힘없는 나라가 되어 결국 나라마저 빼앗기고 만다. 그 때, 수많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아, 우리나라도 근대화 일찍 되었으면.’
그리고 근대화 실패에 대한 책임자를 찾기 시작한다. 그 책임자가 흥선대원군이다.
세계 정세에 대한 파악을 실패하고, 쇄국 정책을 고수해 근대화를 10년 이상 늦춘 흥선대원군.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것만으로 흥선대원군을 바라본다면, 이런 시선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척화비, 가톨릭교도 박해, 두 차례의 양요, 흥선대원군과 대립각을 세운 민비 등등으로 흥선대원군을 설명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것들만으로는 흥선대원군을 설명할 수 없다. 제일 중요한 것 하나가 빠졌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남아있다. 그 상황을 이해한다면 흥선대원군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때 사용했던 조총
결과론적인 시선에서 탈피해 조선시대로 타임 워프를 해보자. 자, 1860년대 초반. 흥선대원군이 처음 집권했을 때이다.
조선은 당시 정치적으로 큰 혼란 상태에 빠져있었다. 임진왜란 전후부터 정조대까지 이어진 붕당 싸움에서 최종 승자는 세도가들이었다. 동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처럼 서로를 견제할 대상을 잃었다. 브레이크를 잃은 세도가들은 자신의 이익을 쌓기 위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뇌물과 벼슬 거래, 막대한 사치에 대한 부담은 모두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덕분에 전국적으로 민란이 끊이질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1861년에 있었던 진주 민란이다.
그 때 혜성처럼 나타난 개혁가가 바로 흥선대원군이다.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세도가는 몰락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에게는 매우 큰 과제가 하나 남아있었다. 세도가들이 지난 60년간 벌여놓은 난장판을 어떻게든 수습해야했다. 그는 파탄난 국고를 어떻게든 해보기 위해 양반에게 세금을 먹이는 등의 개혁을 단행한다.
바로 그 때 제국주의 세력은 인도, 동남아시아를 걸쳐 동아시아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는다.
여기까지가 흥선대원군과 당시 조선의 배경이다. 400년가량의 역사 끝에 조선은 사실상 멸망과 가까워져있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은 어떻게든 그를 수습하고 왕권을 바로 세우려는 개혁가였다.
대원군은 밀려들어오는 서구 세력 앞에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통상이냐, 쇄국이냐! 흥선대원군은 현실 앞에 쇄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과연 통상은 가능했을까? 민심은 사실상 파탄에 가까웠고 유림은 여전히 보수적이었다. 대원군이 사실상 조선의 왕으로 자리 잡았음에도 유림의 반대로 인해 호포제같은 개혁을 실행하는데 꽤나 어려움을 겪었다. 더군다나 아직 개혁할 게 산더미같이 남아있었다. 그 때 과연 대원군은 통상까지 감당해낼 수 있었을까?
아편전쟁
이러한 정치적인 상황뿐만 부담으로 다가온게 아니었다. 아편전쟁또한 흥선군에게 매우 큰 부담이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도 정치적, 경제적인 모순덕분에 사회 전반적으로 큰 문제를 겪고 있었다. 민심이 피폐해져가는 가운데 서구 세력들이 들여온 아편또한 굉장히 큰 골칫거리였다. 중국은 결국 아편 무역을 금지했다. 이권을 잃은 서구세력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사실상 서구의 식민지가 되었다. 대국이었던 중국이 ‘서구 세력과의 통상’으로 멸망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흥선군과 조선 정치권은 통상에 큰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근대화와 제국주의 세력과의 수교는 긍정적인 면만 비춰졌다. 일본의 성공사례덕분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또한 만만치 않았다.
건전한 무역이 이루어지려면 사는 만큼 파는 것또한 있어야한다. 사는건 많아도 파는게 아예 없으면 그 무역은 얼마 안 가 무너진다. 파는 것 없이 사면 살수록 판매자에게 점점 의존하게 된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식민지화가 되어간다.
조선은 산업혁명 국가가 아니었다. 공업품은 모조리 수공업품이다. 다른 산업혁명 국가와는 양도 질도 경쟁이 되지 않는다. 막대한 양의 질좋은 상품으로 인해 산업혁명 전까지는 면공업의 패권자였던 인도 면 시장이 산업혁명으로 무너졌다. 사농공상 사상 덕분에 공업이 발달되지 못한 조선과 서구가 무역을 한다면 조선의 시장이 처참히 부숴질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다. 구한말 서구와의 통상을 해낸 대한제국이 그 꼴이었다. 일본과 중국 상인들의 유입으로 인해 조선의 상권이 처참히 박살난 일은 역사 교과서에도 나와있다.
일본인이 그린 흑선
흥선대원군은 물론 당시 조선의 정치계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통상을 잘못하면 나라가 망한다! 서구와의 통상 이후 만일 근대화에 실패한다면? 영락없는 식민지 행이다. 통상과 무역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투자이다. 베트남처럼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든지, 일본처럼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근대 국가가 되든지. 하지만 아무리 봐도 조선은 전자에 가깝다. 조선이 강화도 조약 이후 처참히 수탈당한 이유가 단지 개항이 8, 9년 늦어져서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흥선대원군에게 통상의 의지가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니다. 3명의 사상자만으로 조선군 수백명을 죽인 증기선과 군함, 후장식 소총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누가 몰랐겠는가. 보수적인 유학 꼴통들은 몰랐다고 쳐도, 실리 파악에 능한 흥선대원군이 그 사실을 몰랐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에 제한적인 통상을 제안한 적이 있을 정도로 통상의 유익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그들과 맞먹기에 너무 덩치가 작았다.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했다. 누구는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입헌 군주제, 완벽한 서구식 탈바꿈 등등. 하지만 이러한 방식들은 충분한 배경이 뒤따라주지 못하면 실패한다. 흥선대원군이 앞장서서 꾸물거릴 시간없이 빠르게 입헌군주제를 이루고 서구식 제도를 정비했다 해도 미래는 달라졌을까 궁금하다.
드라이제 후장식 소총
일본은 이미 17세기 초부터 네덜란드와 꾸준한 교역을 해왔다. 한국, 중국과 비슷한 기준으로 아주 천천히 경험을 쌓았다. 군함사고 후장식 소총사올 돈도 막대하게 많은 부자국가였다. 막부는 안동김씨에 비해 양반이라고 할 정도로 건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화 도중 내전에 무너질뻔한게 일본이다. 근대화 이후에도 불평등조약에 억눌려있었고 결국 대공황때 폭발해버린다. 조선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않는가?
흥선대원군은 시대상을 훌륭히 파악한 개혁가였다. 경복궁, 당백전에 관련해서라면 흥선대원군을 마구 욕해도 좋다. 욕먹을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하지만 그의 쇄국정책과 근대화 실패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아무리 조선을 틀어잡은 개혁가라 하더라도 세계까지 틀어잡기에는 너무 조선이 약한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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