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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바둑을 지금의 규모로 키워낸 일등공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바둑천재 후지사와 히데유키. 그는 생전 일본에서 '이 시대 최후의 무뢰한'으로 불리웠다. 그가 무슨 범죄를 저질러 입건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생전 오로지 자신의 바둑 실력 하나만 가지고 인생을 살아왔다. 그 호방한 모습이 마치 전국시대 때 칼 한자루 차고 전국을 유랑하던 무뢰한 같다 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후지사와는 1925년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69세였다. 요코하마의 부자였던 후지사와 시게고로(重五郞)가 23세의 어린 여성과 새 장가를 들어서 낳은 아들이었다. 바둑천재의 어릴 때의 이름은 후지사와 타모츠(保)였다. 바둑광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도 어릴 때부터 바둑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11세 때부터 정식으로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후지사와 타모츠는 천재의 편린을 보이며 15살 되는 1940년에 바둑 초단을 땄다. 한편 그 당시 일본은 본격적으로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바둑천재가 전쟁의 참화에서 살아남은 것은 그의 가문이 좋았기에 징병을 피할 수 있었던 덕이 컸다. 전세계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던 1943년, 후지사와는 바둑3단을 취득했다.
그의 스승이 후지사와를 가리켜 "이놈의 바둑은 통나무를 휘두르는 거 같은데!"하고 감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세부적인 기술보다 큰그림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 가끔씩 기초적인 실수로 자멸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항상 상대의 예측을 뛰어넘는 통이 큰 바둑을 구사했다.
3단을 딴 것을 계기로 후지사와는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인 타모츠(保)에는 지킨다는 의미가 있었는데 후지사와 청년은 지키는 바둑이 싫었다. 그는 과감하게 나아가는 바둑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름을 히데유키(秀行)으로 바꾸었다. 수행(秀行)은 슈코라고도 읽을 수 있는데 슈코는 취항(배나 비행기가 출발하는 것)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슈코센세'라는 애칭으로 사랑받은 천재바둑기사의 여정을 알리는 듯한 이름이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사회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갔다. 당연히 바둑 같은 기존의 오락을 찾는 인구도 늘어났다.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상금이 걸린 각종 바둑대회들이 생겨났다. 20대~30대의 나이로 집중력이 절정에 달해있던 바둑계의 젊은 호랑이 후지사와는 이들 대회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게다가 통이 큰 기발한 바둑을 구사하기 때문에 매니아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후지사와가 출전하지 않으면 격이 떨어지는 대회라는 인식마저 생겨났다.
하지만 그러한 승승장구는 오히려 후지사와에게 극심한 정신적 부담을 주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극한상황에 몰리지 않으면 집중력이 발휘되지 않기 때문에 작품을 집필하기 전에는 도박에 몰두하여 가진 돈을 모조리 탕진했다고 하는데 후지사와도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집중력이 올라가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천재는 술과 도박에 탐닉했다. 술도 정종 정도로는 취하지 않는다 하여 위스키만 들이켰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 그때부터 바둑 수 공부를 시작했다. 술에 취하지 않을 때에는 허세도 부리고, 신경질도 부리고, 술을 가져오라고 행패를 부렸으나 술에 취하면 그때부터는 사람이 바뀐 듯 바둑 공부에만 매달렸다. 오죽하면 그의 친척이 "멀쩡할 때에는 개만도 못했지만 술에 취하면 바둑의 신이 내려왔다"고 말할 정도였다.
후지사와의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이 맨정신일 때에는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바둑판조차 들여다보기 두려워했다고 회상했다. 알콜의 힘으로 패배에 대한 공포를 잠재우고 나면 그때부터 미친듯이 바둑 공부에 매달렸다. 그리고 대회에 나가면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후지사와의 몸이 먼저 무너지나 연승기록이 무너지나 겨루는 것 같은 파괴적인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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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에서 우승하거나 방송 출연을 하여 목돈이 생기면 후지사와는 곧바로 도박장으로 달려갔다. 다만 바둑으로 온 신경을 다 쓰고 난 후였기 때문에 정신력을 요구하는 도박은 싫어했다. 대신 경륜(자전거 경주), 경마 같이 남이 이기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기를 좋아했다. 경주를 지켜보다가 흥이 오르면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조리 걸기 일쑤였다. 다만 스포츠를 예측하는 안목은 없었기에 번번히 돈을 잃곤 했다. 그러면 화가 난 그는 빚을 져서라도 도박에 매달렸다.
제자들이나 지인들이 말려서야 겨우 집에 돌아오곤 했다. 집에 돌아오면 부인에게 큰소리를 탕탕 치다가 위스키를 마시고 잠들곤 했다. 가정을 팽개치고 밖으로 나도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결코 바둑매니아들 뿐만이 아니었다.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그에게 접근하는 여자들도 끊이지 않았다. 타고난 호인이었던 그는 자기가 좋다고 다가오는 여자들을 뿌리치지 못했다. 결국 혼외정사까지 저질러 신문에서까지 보도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후지사와의 자녀들은 아버지를 증오했다.
하지만 대중적 인기는 어마어마했다. 사람들은 파격적인 라이프스타일과 파격적인 바둑 실력을 겸비한 후지사와를 슈코선생이라 부르며 좋아했다. 혼외정사를 저질렀어도 그는 '역시 이 시대 최후의 무뢰한이다!'하고 찬사를 받았다. 그의 저택은 슈코선생을 흠모하여 전국에서 모여든 아마추어 바둑기사들로 북적였다. 후지사와는 이들을 내치지 않았고 생활비까지 주어가며 바둑을 가르쳤다. 그야말로 바둑계의 맹상군(3천명의 식객을 두었다는 춘추전국시대의 정치가)이었다.
당시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 중에도 후지사와의 팬들이 많았다. 그들은 아무리 금일봉을 선물해도 후지사와가 곧 도박으로 써버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거물정치가 이나바 오사무는 슈코선생이 고리대금업자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만은 막기 위해, "선생님. 제발 돈은 은행에서 빌리십시오. 제가 보증을 서드리겠습니다"하고 권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배꼽이 배보다 더 큰 생활의 끝이 좋을 리 없다. 1971년, 결국 후지사와는 약 3억엔의 도박빚을 졌고 젊을 때의 성공으로 구입해둔 저택을 압류당하게 되었다. 망연자실한 부인과 자녀들을 본 후지사와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철딱서니 없는 남편을 둔 부인, 한심한 애비를 둔 자식들을 최소한 길거리에는 나앉게 할 수 없다는 각오로 그는 도박을 중단했다. 그리고 그가 가진 유일한 재능인 바둑으로 위기를 타개했다고 맹세했다. 마침 요미우리사가 주최하는 당시 일본사상 최고액의 상금이 걸린 바둑 토너멘트 대회 기성위(碁聖位)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목돈이 필요하던 후지사와에게는 천우신조의 기회였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아무도 기대를 걸지 않았다. 당시 후지사와는 50대였다. 일본에서는 바둑기사로서의 전성기는 40대까지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지사와는 이 대회에서 우승하여 가족들을 빚더미에서 구해내지 못하면 사죄의 유서를 쓰고 자살하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식사도 잊고 지금까지 주요 바둑 대회에서 쓰였던 수를 모조리 복습하기 시작했다. 틈틈히 들이키는 위스키가 전부였다.
무서운 집념으로 바둑에 몰두하던 후지사와에게 뜻밖의 위기가 닥쳤다. 다름아닌 알콜중독이었다. 그 무렵의 후지사와는 술이 없으면 바둑을 두지 못하는 중증의 알콜중독자였다. 그러나 대회에서 술을 마실 수 있을 리 없었다. 후지사와는 술을 먹지 않은 상태에서 바둑을 두는 법을 연습해야 했다. 금단증세는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돌릴 정도로 끔찍했다. 후지사와는 사지를 덜덜 떨면서 바둑판을 들여다보았고 (피부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환각을 보았기에) 팔과 가슴을 벅벅 긁으면서 바둑 수가 적힌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부인이 끓여오는 죽을 간신히 들이켰다. 그때까지 알콜의 힘을 빌려 승리의 압박에서 도망치려 했던 후지사와는 이제 반드시 빚을 갚아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서 현실에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알콜중독을 고친 후의 슈코선생. 술 대신 차를 마시게 되었다.
몇달간의 지옥같은 금단증세를 겪고 난 후, 정말로 술기운 없이도 바둑을 둘 수 있게 된 후지사와는 1977년 기성위 대회를 제패하고 초대 우승을 달성했다. 그날 밤에 후지사와는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위스키를 마셔댔다고 한다. 더욱 대단한 일은 그 후로 1982년까지 6번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는 점이다. 6번 연속 우승을 통해 받은 상금으로 도박빚을 모두 변제할 수 있었다. 이 초인적인 위업으로 슈코선생은 그때부터 기성(棋聖), 즉 바둑의 성자로 불리게 되었다.
1983년 기성위에서 후지사와의 7번째 우승을 저지하고 우승한 인물이 바로 조치훈이다. 그 후 조치훈은 각종 대회들을 휩쓸며 우승기록으로는 후지사와마저도 능가하는 금자탑을 쌓게 된다. 젊을 때의 자신을 연상케하는 젊은 사자 조치훈에게 패배한 일로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슈코선생은 바둑에서 한발 물러나 후진양성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역사를 새로 쓴 순간의 조치훈. 제7차 기성위에서 후지사와를 이기고 예를 표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수행숙(秀行塾)을 세우고 일본 국내의 바둑기사들은 물론이고 한국과 중국의 기사들도 받아들여 자신의 바둑을 전수했다. 문화대혁명으로 빈사 상태였던 중국의 바둑이 다시 일어선 것은 후지사와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바둑의 성자 대접을 받았고, 중국에서는 대노사(大老師)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이 때 슈코선생이 매우 아꼈던 제자가 바로 조훈현이었다. 그가 한중일 3국의 바둑에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슈코선생의 노하우가 외국에 유출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슈코선생은 "나의 바둑을 배워 다들 강해지면 나는 그들로부터 배워서 더 강해지면 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슈코선생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1984년에는 오랜 폭음의 악영향 탓인지 슈코선생에게서 위암이 발견되었고 위 절제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암은 전이되어 이번에는 악성 종양이 임파선에서 발견되었다.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항암 투병 생활을 했으나 이번에는 전립선암으로 전이되었다. 이 전립선암은 말기암이라고 했다. 그런데 방사선 치료를 받다가 암이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 전이되지 않았다. 참으로 '이 시대 최후의 무뢰한'이라 불리기에 합당한 엄청난 생명력이었다. 슈코선생은 "암이라고 하니까 중국에 계신 분들이 약초를 이것저것 보내주었는데 그거 덕분인가? ㅎㅎ"하고 말하며 웃었다. 확실히 요즘의 '중국제 약'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항암치료로 바둑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벌충하기 위해 슈코선생은 다시 바둑에 매달렸다. 그리고 다시 많은 타이틀을 획득하고 또 후진들과 겨루며 그들에게 기회를 열어주었다. 제자 조훈현에게 패배했을 때에는 매우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1998년, 73세의 나이 때 고령을 이유로 프로바둑계에서 은퇴를 발표했다.
강렬한 노력. 후지사와의 유명한 말이다. 원문은 "다른사람에게 '이것만은 전하고 싶다'는 강렬한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바둑의 성자가 바둑계에서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슈코선생은 일본바둑계에서 승급에 드는 비용이 너무 높은 탓에 저변 확대를 막고 있다고 주장하며 (기존의 프로바둑기사들이 자기들끼리 바둑계를 독점하고 있다고도 비판) 개혁 운동을 벌였다. 이 일로 당황한 일본바둑계에서는 1999년 슈코선생을 제명했으나 2003년 결국 제명 조치를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바둑을 사랑한다고 하면 일본, 한국, 중국인 상관없이 누구나 받아들여 자신의 모든 것을 가르쳐주려 했던 바둑의 성자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최후까지도 어린 바둑 애호가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일만을 생각했다.
슈코선생이 쓴 친필: 굴굴신(屈屈伸), 즉 몸을 굽히고 굽히다가 쭉 편다는 의미. 인내하고 인내하라는 뜻.
말기암 진단을 받았던 슈코선생은 경이적인 생명력으로 2009년까지 살았다. 그의 손녀딸인 후지사와 리나에게서 바둑 재능을 본 그는 손녀딸에게 바둑을 지도하는 일로 말년을 보냈다. 그리고 후지사와 리나는 현재 프로바둑기사의 길을 걷고 있다.
이 시대 최후의 무뢰한은 노환의 일종인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별다른 유언을 남기지 않았으나 죽기 전에 자신의 부인 후지사와 모토 여사에게 계명(불교에서 죽은 사람의 덕을 기려 붙이는 명칭)을 지어주었다. 자운덕덕대자(紫雲德德大姉)였다. 자운은 부처가 이 세상에 나타날 때 생겨난다고 하는 자주색 구름이고, 덕덕은 문자 그대로 덕이 매우 높다는 의미. 그리고 대자는 큰누님이라는 의미이다. 즉, 슈코선생은 죽기 직전에서야 부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것이다.
후지사와 모토 여사.
사실 슈코선생은 늘 부인에게 폐만 끼쳤다. 젊을 때에는 술과 도박으로 부인을 괴롭혔고 심지어 혼외정사까지 벌였다. 바둑의 성자는 사실 부인에게 싸대구를 맞아도 변명할 도리가 없을 정도로 막장인 남편이었다. 게다가 알콜중독을 끊고, 항암치료를 받으러 다닐 때에도 남편을 돌봐준 사람은 다름아닌 그의 부인이었다. 하지만 허세가 심한 슈코선생은 평소 부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같은 사람하고 결혼하니까 잘된 거지. 다른 놈하고 결혼했다면 삶이 재미 없어서 당장 이혼했을걸!"하고 큰소리를 쳤다.
슈코선생은 폐렴이 심해져 여명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에서 병원에 입원해았다. 마침, 부인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재빨리 자신의 장남을 불렀다. 그리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야, 나 네 엄마 좋아해. 좋아해. 정말 좋아해."
그리고 그날 밤 임종했다. 자신의 부인에게 평생 무뚝뚝했고, 바둑 이외에서는 늘 허세를 부렸지만, 순수한 남자였다.
나중에 장남이 어머니에게 그 일을 전했다. 그러자 후지사와 모토 여사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알고 있었지."
바둑의 성자를 지탱했던 힘은 바둑만이 아니었다. 바로 자운덕덕대자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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