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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 궁시렁 궁시렁

[NBA] 팀의 운명을 바꾼 트레이드 TOP 10

by 멀리던 2022.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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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위 덕 노비츠키, 밀워키 벅스 <-> 로버트 트레일러, 댈러스 매버릭스

유럽과 NBA 대표하는 스타 덕 노비츠키는 1998 드래프트에서 전체 9번으로 밀워키 벅스에 지명 되었다.

그의 재능에 반한 댈러스 매버릭스의 감독 돈 넬슨은 같은해 드래프트에서 자신들이 6순위로 뽑은 로버트 트레일러와 노비츠키를 맞바꿀것을 밀워키측에 요청한다.


드라잔 페트로비치나 블라디 디박, 토니 쿠코치같은 유럽출신 선수들이 NBA에서 어느정도 성공기를 써내려갔지만
당시만해도 유럽출신 용병에 대한 NBA의 평가는 그리 높지 않았다. 노비츠키 또한 그랬다. 전체 9순위로 지명되긴 하였지만
213cm의 큰 키에 달릴 수 있고 슛거리가 길다는 것뿐. 오히려 로버트 트레일러가 피지컬적으로 더 좋다는 평가를 받던터였다.

그리하여 밀워키는 댈러스의 제안을 수락하고야 만다.

하지만 이 트레이드는 밀워키로서는 피눈물을 흘린 선택이 되고만다.
노비츠키는 이후 자신의 커리어동안 올스타 11회, 리그 MVP 1회, 파이널 MVP 1회, 올NBA팀 12회(퍼스트팀 4회)에 선정되며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가 되었고 소속팀 댈러스 매버릭스에 챔피언십링을 선사해주기도 하였다.

반면 로버트 트레일러는 일곱시즌간 평균 4.8득점 3.7리바운드를 기록하는등 주전들의 쉬는시간을 마련해주는 10분짜리 벤치요원으로 커리어를 마감했다.

올해로 35살인 노비츠키는 여전히 댈러스 매버릭스의 에이스로 활약중이며 특유의 원레그 페이더웨이 점퍼로 매경기
20득점 이상씩을 기록하며 소속팀 댈러스를 사우스웨스트디비전 3위로 이끌고 있다.

 

 

 

 

 

9위 찰스 바클리,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제프 호나색, 안드류 랭, 팀 페리, 피닉스 선즈

10위는 전설적 파워포워드 찰스 바클리와 유타 팬들이 스탁턴만큼 사랑하는 백인스타 제프 호나색과의 트레이드이다.
마이클 조던과 1984년 드래프트 동기로 전체 5번에 필라델피아에 지명된 찰스 바클리는
처음 2년차때까지는 팀의 대선배이자 NBA의 슈퍼스타들인 줄리어스 어빙과 모제스 말론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으나
3년차들어 시즌평균 23.0득점 14.6리바운드 4.6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생애첫 올스타에 선정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바클리의 소속팀 필라델피아는 정규시즌에서 꾸준히 40~50승씩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늘상 오르는 괜찮은 팀이었다.
하지만 1992년 필라델피아는 찰스 바클리를 피닉스 선즈의 제프 호나색과 안드류 랭, 팀 페리와 엮어서
어처구니 없는 3대1 트레이드를 단행하고 만다. 피닉스에 1라운드 신인 지명권 한장 요구하지 않고 말이다. 호갱 오브 호갱급 거래였던것이다.

덕분에 필라델피아는 92/93시즌부터 6시즌간 플레이오프 근처도 못가고 정규시즌에서 20승대에 머무는 약체팀이 되버리고 만다.
바클리는 피닉스로 팀을 옮긴 첫해 시즌 평균 25.6득점 12.2리바운드 5.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리그 MVP에 선정되었고
소속팀 피닉스에 프랜차이즈 역대 정규시즌 최다승인 62승을 선사해주며 NBA파이널에 올려놓기까지 하였다.

반면 경기당 20득점이 가능한 슈터였던 제프 호나색은 필라델피아에서 한시즌 반동안을 뛴채 유타로 또 다시 트레이드 되어버렸고,
안드류 랭은 한시즌만에 애틀란타로 트레이드 되었다. 팀 페리는 그나마 세시즌반이나 뛰었는데 그동안 평균 6.9득점을 올렸을 뿐이었다.

 

 

 

 

 

 

8위 스카티 피펜, 시애틀 슈퍼소닉스 <-> 올든 폴리니스, 시카고 불스

위대한 수비수이자 마이클 조던과 함께 90년대 불스왕조를 이끈 위대한 선수 스카티 피펜.
그는 1987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5번으로 시애틀 슈퍼소닉스에 지명된다.
하지만 곧 시카고 불스의 센터 올든 폴리니스와 1라운드 신인지명픽, 2라운드 신인지명픽 각각 한장씩울 더해 맞트레이드 된다.

이렇게하여 아칸소의 작은 시골대학 출신의 깡마른 청년 스카티 피펜은 211cm의 건장한 체격의 센터 올든 폴리니스과 옷을 바꿔입게 된다.

스카티 피펜은 시카고에 입성한 후 올스타 7회, 올NBA팀 7회, 수비팀 10회에 선정되었고 우승컵을 무려 6번이나 들어올리게 된다.
반면 폴리니스는 서른중반까지 현역으로 뛰며 평균 7.8득점 6.7리바운드를 기록하는 평범한 커리어를 보냈다.

 

 




 

 

7위 제임스 워디 <->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1982년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

1980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LA 레이커스에 부치 리와 1982년 드래프트 1라운드 신인 지명권을 주는 대신

돈 포드와 1980년 드래프트 1라운드 신인 지명권을 받아온다.

그렇게해서 클리블랜드는 198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채드 킨츠를 뽑았고 레이커스는 클리블랜드로부터 받아온 신인 지명권으로 198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번으로 제임스 워디를 뽑는 행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클리블랜드가 완전 호갱이 되고 말았던것.

클리블랜드에 지명된 채드 킨츠는 계속해서 부진한모습을 보였고 결국 시즌중간에 댈러스 매버릭스로 트레이드 된다.

그리고 결국엔 단 한시즌도 버티지 못하고 방출되고야 만다.
반면 NCAA 파이널포 MOP 출신의 제임스 워디는 레이커스에서 12년간 7번의 올스타에 선정 되었고 매직 존슨, 카림 압둘자바와 같은 최고의 동료들과 함께
세번이나 NBA 우승을 경험하였다. 

 

 

 

 

 

 

6위 모제스 말론,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 버팔로 브레이브스 1978년 1라운드픽 <-> 릭 로베이, 인디애나 페이서스

모제스 말론은 ABA팀이었던 스피릿츠 오브 세인트루이스가 해체 되면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가 줏어온 선수이다.
유타 스타스 시절 19살의 나이로 리그 올스타에 선정 되었던 스타인 그를 포틀랜드는 제대로 써보지도 않고
1976년에 버팔로 브레이브스(현 LA 클리퍼스)로 보내버리고 1978년 드래프트 1라운드 픽을 대신 받아온다.
그리고는 버팔로로부터 받아온 신인 지명권을 또 다시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조니 데이비스와 맞교환하게 된다.

포틀랜드가 모제스 말론 대신 데려온 조니 데이비스는 팀에서 단 두시즌만을 뛰며 평균 9.4점 2.3어시스트라는 평범한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반면 모제스 말론은 휴스턴 로케츠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를 거치면서 12번이나 올스타에 선정 되었고 세번의 리그 MVP에도 선정 되었다.
82/83시즌에는 줄리어스 어빙과 함께 NBA 파이널에서 매직 존슨, 카림 압둘자바가 있던 LA 레이커스 만나 시리즈 스코어 4-0으로 스윕하며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파이널 MVP에도 선정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정규시즌과 파이널 MVP를 지냈던 터프가이 모제스 말론을 고작 1라운드 신인지명권과 맞바꾼 포틀랜드의 이러한 결정은 1984년 드래프트에서 마이클 조던을 뽑지 않고 샘 보위를 뽑았던만큼의 멍청한 선택으로 기억되어지고 있다.

 

 

 

 

 

 

5위 코비 브라이언트, 샬럿 호네츠 <-> 블라디 디박, LA 레이커스

5위는 LA 레이커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코비 브라이언트이다.
코비는 1996년 드래프트에서 13번으로 샬럿 호네츠(현 뉴올리온즈 펠리컨스)에 지명되자마자 LA 레이커스의 센터 블라디 디박과 트레이드 된다.

처음에 레이커스 팬들은 코비를 반기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센터가 가드가보다 더 귀한 포지션이었고 디박은 시즌 평균 15득점과 10리바운드가 가능한
A급 빅맨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비는 고졸신인으로서 아무것도 검증되지 않은 풋내기에 불과했다.

트레이드는 양팀 모두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디박이 팀에 합류한 96/97시즌 샬럿은 정규시즌에서 54을 거두며 프랜차이즈 최다승을 올렸으며
코비가 합류한 레이커스 또한 56승이나 올렸다. 하지만 디박이 팀의 주축 센터로 활약했다면 코비는 팀의 주전인 에디 하우스의 백업으로 출전해
평균 7.6득점만을 기록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레이커스의 '더 맨'은 샤킬 오닐이었다.

이후 코비는 2년차 시즌에 올스타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고 99/00시즌부터 내리 3시즌을 연속해서 우승을 경험하였다.
디박은 새크라멘토 킹스로 팀을 옮긴 후 효율성의 극을 달리는 모션 오펜스를 구사했던 릭 아델만 감독의 지도아래 밀레니엄 킹스의 주축멤버가 되었다.

유니폼을 서로 맞바꿔 입었던 코비와 디박은 2002년 NBA 플레이오프 LA 레이커스와 새크라멘토 킹스간의 서부컨퍼런스 파이널무대에서 만나게 된다.
결과는 7차전까지 진행된 시리즈에서 새크라멘토가 아쉽게 패배하고 말았다.
(5차전까지 3승 2패로 앞섰던 새크라멘토였지만 6차전에서 레이커스에 무려 40개의 자유투가 쏟아졌고 덕분에 106대 102로 승리할 수 있었다. 이 경기는 결국 팀 도너기 심판이 연루된 승부조작경기로 밝혀졌다.)

코비는 이후로도 올스타에 여러회 선정되었고 시즌 MVP와 파이널 MVP에도 선정 되었다. 득점왕에는 두번 올랐다.
디박은 00/01시즌 단한번 올스타에 선정 되었을 뿐 리그 정상급 센터로 다년간 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챔피언십링을 손에 넣지 못한채 은퇴 하였다.

 

 

 

 

 

 

4위 윌트 체임벌린,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아치 클락, 제리 챔버스, 대럴 임호프, LA 레이커스

100득점의 사나이 윌트 체임벌린은 워리어스와 세븐티식서스 시절 10년연속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평균 27.7득점과 19.0리바운드를 기록했던 괴물센터였다.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는 68/69시즌을 앞두고 LA 레이커스의 아치 클락, 제리 챔버스, 대럴 임호프와 채임벌린을 맞바꾸게 된다.
당시 최고 선수중 하나였던 채임벌린을 그저 그런 평범한 선수들과 맞바꾼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바가 없다.

덕분에 68/69시즌 LA 레이커스는 기존의 제리 웨스트, 엘진 베일러에 윌트 체임벌린까지 가세 시키며 NBA 최강의 라인업을 구성하게 되었고
빌 러셀이 버티고 있는 보스턴 셀틱스를 물리치고 NBA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릴 장미빛 미래에 흠뻑 취하게 된다.
하지만 그해 파이널에서 보스턴에 패한 레이커스는 또 다시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다. 지난 11시즌동안 준우승만 일곱번째였다.

이후 빌 러셀이 은퇴를 하게 되고 체임벌린은 웨스트와 함께 71/72시즌 레이커스의 우승을 일궈내며 자신도 파이널 MVP에 선정되는 기쁨을 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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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 카림 압둘-자바, 밀워키 벅스 <-> 브라이언 윈터스, 엘모어 스미스, 데이브 메이어스, 쥬니어 브릿지맨, LA 레이커스

1975년 밀워키 벅스는 팀의 절대적 에이스이자 NBA의 슈퍼스타인 카림 압둘자바를 LA 레이커스로 트레이드 해버린다.
압둘자바는 70/71시즌 플레이오프에서 평균 26.6득점 17.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밀워키를 NBA 챔피언으로 이끈 장본인었기에
그가 이런식으로 트레이드 된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바가 없다.

압둘자바를 보내는 대신 비슷한 위치의 선수들을 받아온것도 아니었다. 쥬니어 브릿지맨과 데이브 메이어스는 1975년 드래프트에 갓 지명된 신인선수들이었고,
올스타에 뽑혔던 선수는 단 한명도 없었다.

압둘자바는 레이커스로 팀을 옮긴 후 매직 존슨, 제임스 워디 등의 재능있는 선수들을 만나 다섯번이나 NBA 챔피언십링을 손에 넣게 되었고 불멸의 기록이 될지도 모르는 통산 38387득점을 올리며 NBA 역대 통산득점 1위의 대기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반면 밀워키가 압둘자바를 보내는 대신 데려온 네명의 선수중 브라이언 윈터스만이 단 두번의 올스타에 선정 되었을 뿐 나머지 선수들은 평범한 커리어를 보냈다. 게다가 데이브 메이어스는 부상으로 고생하다 네시즌만을 뛰고 1980년 은퇴하게 되었다. (압둘자바는 41살의 나이인 1989년까지 현역으로 뛰었다)

 

 

 

 

 

 

 

2위 뉴올리온즈 1979년 드래프트 1라운드 신인 지명권(매직 존슨) <-> 게일 굿리치, LA 레이커스

1976년 LA 레이커스의 올스타 슈팅가드 게일 굿리치는 LA를 떠나고 싶어했고 뉴올리온즈는 굿리치를 원하고 있었다.
이에 뉴올리온즈는 굿리치를 데려오는 대신 1979년 드래프트 1라운드 신인 지명권을 레이커스로 건네준다.

이 선택이 뉴올리온즈에게 어떠한 재앙으로 다가올지는 당시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이윽고 3년 후 미시간주립대 시절 NCAA 파이널포 MOP(Most Outstanding Player)와 AP올아메리칸팀에 2번 선정된 매직 존슨이 1979년 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된다.

레이커스는 뉴올리온즈로부터 건네 받았던 1979년 드래프트 1라운드 신인 지명권을 행사했고 전체 1번으로 매직 존슨을 뽑아갔다.
그리고 매직 존슨이 데뷔한 첫해인 79/80시즌 레이커스는 NBA 우승을 차지하였는데 매직 존슨은 파이널에서 평균 21.5득점 11.2리바운드 8.7어시스트
라는 괴물같은 기록을 찍어내며 파이널MVP에 선정되었다.

한편 레이커스로부터 굿리치를 데려온 뉴올리온즈는 76/77시즌에 35승 47패, 77/78시즌에 39승 43패, 78/79시즌에는 26승 56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내고만다. 그리고 굿리치는 은퇴하게 된다.

매직 존슨은 이후에도 레이커스에 4번이나 더 우승트로피를 가져다 주었고 리그 MVP 3회, 파이널 MVP 3회, 올스타 12회, 올NBA팀 10회에 선정되는등
역대 NBA를 대표하는 슈퍼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보스턴 셀틱스의 래리 버드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 수많은 명승부를 탄생시키며 NBA를 미국인이 사랑하는 프로스포츠로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1위 빌 러셀, 세인트루이스 호크스(현 애틀란타 호크스) <-> 클리프 헤이간, 보스턴 셀틱스

대망의 1위는 NBA에서 열손가락에 우승반지를 끼고도 한개가 남는 위대한 센터 빌 러셀이다.
1956년 드래프트 전체 2번픽으로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에 지명된 러셀은 보스턴 셀틱스의 클리프 헤이간과 트레이드 된다.

이 둘은 대학시절 NCAA를 대표하는 스타선수들이었다. NCAA 파이널포MOP에 선정되기도 했던 빌 러셀은 샌프란시스코대학 3년동안 평균 20.7득점 20.3리바운드를기록하며 수비에 일가견을 나타냈던 선수였고, 헤이간은 캔터키대학 졸업반때 24.0득점 13.5리바운드를 기록하였다.
(러셀과 헤이간은 각각 2회씩 AP 올아메리칸팀에 선정되기도 했다)

당시 보스턴은 빌 셔먼-밥 쿠지 백코트라인으로 이어지는 리그 최강의 공격팀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공격력에 비해 성적은 신통치 못했고 팀의 감독이었던 레드 아워벅은 대학 최고의 수비수인 러셀을 강력히 원하게 된다.
한편 세인트루이스는 러셀을 전체 2번으로 뽑아두고도 고민에 빠진다. 50년대만 해도 미국은 인종차별이 심하였고
세인트루이스는 모든 선수들이 백인이었다. 게다가 소속선수들은 경기중 흑인선수들에게 Baboon, Black niggers라며 조롱하기까지 했다.

결국 백인 선수인 헤이간은 보스턴을 떠나 세인트루이스로, 흑인 선수인 러셀은 세인트루이스를 떠나 보스턴으로 자리를 바꾸게 된다.

트레이드에 대한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헤이간과 러셀이 데뷔한 56/57시즌 파이널에서 보스턴과 세인트루이스가 파이널 무대에서 만난것이다.
결과는 시리즈 스코어 4-3으로 보스턴의 승리였다. 1946년 창단 후 첫 우승이었다.
다음시즌에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헤이간과 밥 페팃의 활약덕분에 세인트루이스가 파이널에서 보스턴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것.
하지만 이후 양팀의 행보는 완전히 엇갈리게 된다. 보스턴은 8년연속으로 NBA 챔피언이 되었고 세인트루이스는 이런 보스턴에 막혀 단 한번도
NBA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했다.

러셀은 선수 경력동안 11번의 NBA 우승을 비롯해 MVP 5회, 올스타 12회, 올NBA팀 11회, 리바운드왕 5회에 선정되었고
헤이간은 우승 1회에 올스타 선정 6회로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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