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시작합니다
17살에 이미 조선최고의 주먹으로 소문났던 김두한은 겨우18살인 1935년 보스의 자리를 차지하게된다.
우직하면서 머리도 잘돌아갔던 정진룡은 당연히 김두한의 최측근 참모가 되었다.
18살의 주먹패 오야붕과 참모였지만 어느누구도 그들을 거부하지 못했다. 나이는 어렸지만 너무나도 완벽했던 그들이어기에 나이가 훨씬 많은 주먹들도 모두 그들 밑에서 일할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 후에 이야기는 드라마에서 나왔던 그대로이다. 김두한과 정진룡은 경성 주위를 돌아다니며 마구 휘저었다.
마포,서대문,시구문,왕십리,동대문,남대문,영등포,,광화문,청량리,서울역등 서울의 굵직굵직한 나와바리를 차지하고있던 주먹부대들은 모두 박살이났고 오야붕들은 모두 그들에게 꿇었다.
그러자 대구,목포,광주,인천,수원등의 지방세력은 자청하여 복종해왔다.
"이거 이북놈들이랑 부산놈들이 말을 안들어서 말이지....진룡아 니가 애들데리고 부산을 좀 날려줘야겠다. 그쪽 뱃놀이 하는놈들이 돈좀 만진다니까 뭐하면 너가한번 관리를 맡아봐"
"그러지"
정진룡은 100여명의 주먹부대를 이끌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은 오야붕 김수남을 비롯해 후에 명동의 황병관을 총으로 쏴죽이게되는 마사이찌 고영묵, 이상득등 강펀치들이 많았으며 세력또한 컸다.
정진룡과 돌격대장 털빠진개고기(이하 개고기)는 고영묵과 일본인이 관리하는 선착장을 공격해서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고영묵은 개고기와 맞상대를 걸었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개구리처럼 쭉뻗어버리고말았다.
김수남은 버틸때까지 버텨보았으나 결국엔 힘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진룡에게 항복하였다.
부산은 제2의 도시라 불릴만큼 인구도많았고 돈벌이도 좋았다. 정진룡은 이곳에서 오야붕 역활을하며 부산을 완전 휘어잡게된다.
그즈음 김두한은 이북에 대해서 대대적인 공격을 벌이고있었고 개성,평양등이 속속히 종로에 협력을 약속하였다. 정진룡은 개고기와 부하들을 보내 김두한의 이북 공격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정진룡은 종로로 다시 상경하기에 이른다. 부산의 오야붕 김수남은 고영묵에게 부산을 맡기고 이상득과 함께 정진룡의 밑에서 일하게된다.
이후 김두한은 신마적,마루오카등 조선과 일본의 내노라 하는 주먹들을 모두 보기좋게 눕혀버렸고 경성에서 김두한의 위상은 더 높아만 갔다.
정진룡은 먹을것이 많은 명동으로 틈이 날때마다 진격하려했으나 일본의 야쿠자들이 많이 모여있는 명동은 쉽게 떨어지지않았다.
"난 저 명동의 주인이 되고싶다"
정진룡은 늘상 그렇게 말했다.
이후 고노에와 하야시의 일본 야쿠자들과 대결한 그 유명한 장충단공원의 결투에도 김두한과 정진룡은 같이 싸워 이겼고 김두한이 일본군3명을 구타하여 쫓기게 되었을때도 함께 있던 사람이 정진룡이었다.
이정재,김영태등과 더불어 김두한 부대의 브레인이었던 정진룡은 1943년 징용을 피하기 위해 경성으로 올라온 조선전국의 수천명의 주먹들에게 연설을 하는 일을 맡기도하였다.
*(자료에는 징용을 피하기 위해 경성으로 들어온 어깨들이 500여명이었다고한다. 하지만 그들은 기존의 종로주먹패들이거나 최초 소집되었던 일부 경성의 주먹들만의 명단을 작성한 숫자였다. 그후 경성의 다른 주먹사단이나 타 지역의 주먹들이 속속히 종로로들어왔음에도 일본셩찰은 더 이상의 숫자파악은 하지않았다. 그 숫자는 3~4천을 헤아렸다고한다.)
그러던 1945년 조선은 해방을 맞게 되었고 경성에 있던 주먹들도 모두 만세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진룡은 김천호와 개고기에게 급히 주먹부대 소집을 명령했다. 김수복,이상륵,심청이,흑기사,진구,아오끼,마도등 정진룡의 명령만 따르게 되어있는 직속부대가 모두 모였다.
"명동으로 진격한다"
김두한의 부하들이 일본의 경찰서를 공격하고 그들이 남기고간 재산을 털고있을때 정진룡은 수십대의 트럭에 부하들을 가득싣고 명동으로 달렸다.
아직까지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의 부랑아들이나 어중이떠중이 조선주먹패들은 정진룡의 부대에게 얻어맞고 모두 쫓겨났다.
고노에의 사무라이 야쿠자들이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버린뒤라 명동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었다.
정진룡이 명동을 먹어버렸다는 말을 들은 김두한은 경악한다. 그야말로 정진룡이 독자적으로 행동하여 선수를 쳐버렸기때문이다.
정진룡은 발빠르게 움직여 명동을 거점으로 삼아 박헌영,신불출등 공산주의자들과 여러차례 자리를 같이했고 황철,심영등 당대최고의 배우들까지 돈으로 매수하여 공산주의진영에 가담시켰다.
뿐만아니라 경성의 여러극장들과 시공관등 명동의 극장에서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영화를 돌리게하였으며 주먹들에게까지 공산주의 이념과 사상을 가르치며 적극나서고있었다.
신영균,홍만길등 김두한의 측근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세를 불리는 정진룡에게 위협감을 느꼈다.
그들은 여러차례 정진룡을 제지해야한다고 김두한에게 건의하였지만 김두한은 엉뚱한 명령을 내렸다.
"해군무관부를 박살낸다."
김두한과 주먹들은 경찰서등에서 노획한 총기들로 무장한체 남아있던 일본군 해분무관부를 기습공격하여 전원 무장해제시켰고 그들은 얼마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김두한과 부하들은 각종무기들을 모두 창고에 넣어 보관하였다.
정진룡은 김두한을 불러 박헌영,신불출등과 만나게 해주었다. 그들에게 공산주의이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김두한은 정진룡의 적극 추천으로 좌익주먹단체인 전위대 단장을 맡게되었다.
하지만 너무 설쳐대는 정진룡으로 인해서 김두한을 포함하여 그의 부하들은 정진룡에게 적지않은 불만을 품게되었다.
이때를 즈음하여 이북에서 주먹들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북은 이미 공산화되어가고있었고 공산주의체제에서는 주먹이 살수가 없었다.
그들은 남으로 내려와 명동에 정착했다. 정진룡과 김두한은 처음엔 그들을 내몰려고하였다. 하지만 김두한은 태도를 바꾸어 이화룡등 이북에서 내려온 주먹들을 명동에서 살게 해주었다.
아마도 정진룡을 더이상 크지 못하게 견제하려는 일종의 의도일수도있었다. 역시나 정진룡은 반공산주의사상을 갖고있던 이북주먹들이 명동에 터를잡자 노발대발하였다. 우미관 문을 박차고 들어가 김두한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기도하였다. 하지만 김두한은 이북주먹들의 딱한 처지를 내세우며 정진룡의 청을 묵살했다.
1차로 김두한과 정진룡이 대립하여 틀어진 원인이 되고야 말았다.
이북주먹들은 계속 내려와 명동에는 이북에서 내려온 주먹들과 정진룡의 부대들이 활보하며 온통 건달천지가 되어가고있었다. 거기다 김두한은 직계부하들을 명동에 파견하여 간접적으로 정진룡을 경계하고있었다.
주먹세계에서는 정진룡과 약간의 마찰이 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정진룡과 김두한은 이미 한배를 탄 몸이었다. 단장을 맡은 김두한은 김일성에게 금단추가 달린 군복까지 하사받았다.(이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말들이 많지만 증거물과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던것으로봐서 사실인듯한 이야기이다.)
조선주먹계를 쥐고있는 거물이 좌익단체에 가입되자 우익단체가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그들은 염동진(잘모르는 사람들은 수수께끼의 인물이라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였던 비밀 우익단체 백의사 단장이었다)이라는 단장의 지휘아래 사람들을 보내서 끊임없이 김두한을 회유하였다. 김두한이 쉽게 움직이려하지않자 아버지 김좌진이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살해당한 이야기와 김좌진과 독립운동을 하였던 동료들까지 데리고와 김두한을 설득하였다.
결국 김두한은 좌익을 버리고 우익의 백의사에 가담하게 되었다. 전위대 결성식에 참가하지 않은체 그날 김두한이 첫번째 맡은 임무는 공산주의 거물 박헌영납치였다. 하지만 이일은 실패로 돌아가게되었고 전위대는 순식간에 한바탕 뒤집혀버리게된다.
정진룡은 김두한을 찾아가 항의하였으나 김두한은 공산주의와 결별을 선언하고 우익단체로 활동할것을 선언하였다.
이제 김두한과 정진룡은 같은 하늘아래서 살수없는 원수가 되어버린것이다. 김두한 대신에 정진룡이 전위대 단장을 맡게되었다.
김두한은 그해 1945년 12월 7일 공산당과 전위대가 야심차게 준비하고있는 국군준비대를 급습했다. 해군무관부와 경찰서등지에서 빼앗은 무기들로 주먹들을 무장시킨 김두한은 선제공격을 감행해 1300여명을 죽이고 700여명에게 전향서를 쓰게했다.(이부분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 사람들은 김두한의 별동대인 대한민청 청년단이 결성된것이 1946년 4월이라 김두한의 국군준비대 습격사건은 허구라 말하고있다. 허나 대한민청 결성 이전부터 김두한은 이미 백의사라는 이름하에 부하들을 동원해 백색테러를 일으키고있었다. 대한민청 결성과는 전혀상관 없는 국군준비대 공격이었으며 미군정의 비밀자료에 따르면 테러를 받은 국군준비대의 사상자가 천 수백을 헤아린다고 나와있다. 또한 당시 공격에 참전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국군준비대 공격은 실제 있었던 일이며 당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정진룡과 공산주의자들이 야심차게 계획했던 국군준비대는 이렇게 일순간에 박살이 나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백색테러는 계속되어 이듬해 1월 신영균을 선두로한 주먹부대는 시공관을 기습공격하여 공산주의 찬양 공연을 하고있는 신불출을 납치하였다. 전위대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속수무책 파도와 같이 달려드는 백의사 단체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였고 신불출을 지키지못하였다. (정진룡의 부하였던 진구는 김두한의 부하인 아오마스 심종현에게 얻어맞고 즉사해버리는 일도일어났다.)
신영균과 주먹들은 신불출을 다른곳에 있는 한적한 창고로 끌고가 마구 두들겼다. 특히 두다리를 집중적으로 두들겨 다시는 일어설수없게 만들어버렸다.
1946년 4월 대한민청이 결성되었다. 김두한과 주먹패들은 대한민청 청년단 별동대를 조직했다. 각지에서 주먹패들뿐만 아니라 일반 젊은이들까지 몰려들었다.
이들은 처음엔 은밀히 친일파 출신이나 공산주의자들중 부호들의 집을 털어 자금을 마련했지만 대한민청이 발족하고 미군정과 경찰의 묵인하에 그때부터는 대놓고 그들의 돈을 마음껏 땡겨썼다.
이렇게 모인 돈은 모두 공산당을 때려잡는데 들어갔다.
대한민청 청년단 별동대는 전성기 그 수가 1만을 헤아린다는 소문도있었다. 좌익단체들에게는 그야말로 저승사자와도같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경찰에 잡히면 살아도 김두한 청년단에 잡히면 죽는다" 이말은 이미 좌익들 사이에선 불문율처럼 퍼져있었다.
대한민청 청년단의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공산주의자 황철과 심영이 출연하는 선동영화 '님'을 상영하는 중앙극장을 테러하였다.
정진룡은 직접 부하들을데리고 김두한을 납치하려하였으나 김두한이 총으로 거세게 저항하자 물러났다.
김두한의 대한민청은 이후 좌우합작을 기도하는 여운형 살해미수사건에 개입하였으며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 불법에 항의하여 진행하는 용산파업현장에는 그때까진 정식적인 결성식을 가진것은 아니지었만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하에 모인 명동주먹들과함께 쳐들어가 파업자들을 두들기며 진압하였다. 이후 서북청년단은 단독으로 공산당 중앙본부까지 쳐들어가 박살을냈다.
대한민청 청년단의 활동은 계속되어 이후 대구폭동사건,경성방직파업현장,태창방직파업현장,파주 농민협회시위현장등 공산주의자들이 모여있는곳에 투입되어 그들을 힘으로제압하였다.
이듬해인 47년1월 정진룡의 조선민청은 삼각산에서 청년단 단합대회를 열었다. 1946년5월부로 공산당은 불법화되었지만 조선민청은 정식적으로 공산당조직이라는 선언을 하지않았기때문에 해산명령은 받지않고있었다.
공산당이 불법이된5월이후 10월에 야심차게 준비했던 전국의 공산당파업이 대한민청의 진압으로 모두 실패로끝나자 조선민청으로서는 무언가 자극이 필요했다.
정진룡은 좌익주먹들을 모아 전의를 다지고 대한민청 청년단과 한바탕 전쟁을 선언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김두한의 대한민청 청년단 별동대는 경찰의 비호아래 단원들을 이끌고 단합대회장을 기습했다.
무방비의 조선민청 전위대들은 무장한체 사방팔방 밀려오는 청년단들을 당해내지 못한체 하나둘씩 나가떨어지고있었다.여성당원 김해숙은 권총으로 자결하였으며 결국 정진룡은 후퇴명령을 내렸고 조선민청 전위대는 태반이 죽거나 청년단에 사로잡혀버린체 급속히 악화되고말았다.
절치부심하던 조선민청은 47년4월16일 시공관에서 펼칠 큰 계획을 세운다. 이승만의 귀국날에 맞춰 이승만을 비난하고 공산당을 찬양하는 공연을 펼치려한것이다.
이날의 이름은 '제일선'이라고 대중들에게 소개했다. 시공관에서 펼쳐지는 '제일선'에는 유명배우들이 출연하는 '청춘의봄'공연과 만담가 신불출의만담, 그리고 반공산주의자인 이승만에 대한 비난등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민주주의를 배척하는 여러가지 이벤트가 펼쳐질 계획이었다.
대한민청의 공격을 대비하여 이번엔 정진룡이 직접 100여명의 전위대대원들을 이끌고 경비에섰다.
정진룡의 오른팔 왼팔인 개고기와 김천호가 정진룡의 명령을 받아 병력들을 배치했다.
이 엄청난 일에 대한민청이 손놓고있을리 만무했다.
김두한은 신영균,조희창,홍만길,김관철등 좌익주먹들에겐 악명높은 이들을 선두로삼아 단원들을 이끌고 시공관을 공격했다.
대한민청과 청년단과 조선민청 전위대가 정면으로 맞붙은것이다. 사방팔방에 몽둥이 찜질이 가해지고 이곳저곳 잠들어버린 주먹들이 수두룩하였다. 신불출은 직원의 도움을 받아 뒷문으로 빠져나갔으며(이후 북으로 건너간다)
개고기와 김천호는 높은 계단위에서 주먹들을 이끌고 청년단의 진입을 결사적으로 막고있었다. 허나 다른 통로들은 이미 청년단원들에게 모두 뚫려버린 후였다.
개고기는 발악으로 권총까지 발사하려했으나 김무옥이 그순간 개고기를 덮쳐 권총을 빼았고 자신의 권총으로 개고기의 양미간을 마구내려쳤다. 그리고 단원들이 개고기를 집단 린치하자 개고기는 찍 소리도 못하고 죽어버렸다. 끝까지 항전하던 정진룡과 김천호도 모두 단원들에게 제압당했다. 사방에는 죽거나 부상당한 전위대원들이 즐비하였다.
뒷수습은 경찰의 몫이었다. 신영균은 정진룡,김천호등 간부급 10여명을 사로잡아 부하들과 함께 김두한을 호위하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경찰은 나머지 전위대원들을 체포하거나 죽어있는 전위대원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남산의 대한민청 본부로 정진룡등을 데려온 신영균은 좌익들을 족치는 허름한 창고로 이들을 모두 몰아넣었다.
김두한은 정진룡에게 어떻게 해서든 공산주의를 그만두겠다는 전향서를 받아내려했다. 하지만 정진룡은 끝까지 묵묵부답이었다.
김두한이 직접 정진룡을 설득했다. 하지만 정진룡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결국 김두한이 나가고 다시 신영균과 조희창이 들어와 정진룡등을 구타하며 전향서를 쓰라고 강요하였다.
정진룡은 신영균에게 침을뱉어가며 오히려 욕을헤댔다.
흥분한 신영균은 몽둥이로 정진룡과 김천호의 머리를 내려쳤고 이둘은 금새 축 늘어져 죽어버렸다.
흥분한 신영균과 조희창은 부하들을 시켜 나머지 공산당원들도 마구 조졌다. 9명이 병신이됐고 1명은 벌벌떨며 전향서를 썼다.
신영균과 조희창은 김두한에게 정진룡과 김천호를 죽이고 9명을 불구로 만들었으며 1명의 전향서를 받아냈다고 보고하였다.
김두한은 대노하여 신영균과 조희창을 마구 후려쳤다. 다른 간부급들이 겨우 김두한을 말렸고 김두한은 전향서를쓴 대원을 보내주었다.
헌데 그 대원은 미군정에 사실을 알리고 청년단을 신고해버렸다. 청년단과 같은편인 경찰이 두려워 중립적인 미군에 바로신고해 버린 것이다.
이일로 청년단 간부급들은 모두 연행돼 미 군사재판에 서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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