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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궁시렁 궁시렁

김두한의 장충단공원 혈투..

by 멀리던 2020.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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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77년전 일제강점기시기 ....   오전6시경...겨울이라 아직은  컴컴한 어둠속에 그날따라 안개는 유난히 짙게깔려이었다. 그 암흑사이로 문제의 사나이들이 조금씩 모여들고있었다.

문제의 사나이들은 한(조선).일 최고의 건달과 야쿠자들.... 역사상 다시없을 한.일 양국 최고의 싸움꾼들이 맞대결을 하려하고 있었다.

오바겠지만 대첩이란 말을 붙인다면 감히 장충단 대첩이란 표현을 쓸수있을까?

77년전 장충단 공원에서는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2년 겨울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최고의 시청률을 찍었던 종로패와 혼마찌의 장충단공원 혈투. 화려한 액션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야인시대의 하이라이트였다.

하지만 드라마속의 그 긴박하고 화려했던 액션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알고 싶어했던 것은 77년전 그날 장충단공원에서의 실제대결이었을것이다.

과연 정말대결했는가? 왜 대결을 해야만했는가? 어느편이 이긴것인가? 정말로 드라마처럼 종로패는 핸디캡을 안고 싸웠을까? 혼마찌는 니폰도를 들고 싸웠을까?.... 수많은 의혹과 궁금증이 제기됐다.

하지만 너무나도 오랜시간이 지난 지금 아무도 그때의 진실을 증명해줄 사람은 없다. 또한 증거또한 없다. 오히려 그랬기에 야인시대는 픽션을 넣어 더욱 박진감 넘치게 이야기를 그려낼수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시절 주먹사회의 판도를 바꾼 이 획기적인 사건은 결국 증명해낼 방법없이 그대로 묻히는것일까? 아니면 일부사람들이 말하는것과 같이 허풍과 뻥일까?

설사 그것이 허풍과 과장으로 가득한 거짓일지라도 그것을 한번 재조명해보는것은 가치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현재까지 장충단 공원의 혈투를 증명해줄수있는것은 김두한이 작고하기전 출현했던 대담프로그램 '노변야화'뿐이었고 여기에 모든것을 전적으로 맞추고있다.

그당시 사람들은 이미 모두 이세상 사람들이 아니고 흘러나오는것은 모두 '이랬다' '저랬다' 같은 풍문들 뿐이었다. 그렇다고 일본에가서 그당시 야쿠자들을 찾아낼수도 없는일이었으니....

장충단 혈투를 증명해줄수있는것은 김두한의 증언과 2003년당시 생존해계셨던 김두한 직계 홍xx, 그리고 혈투에 참전했던 종로패 김삼수의 직계 막내 고xx의 증언뿐이다.

하지만 홍xx와 고xx역시 현장에 있지는 않았기에 그들의 얘기 역시 당사자들의 증언이라면 증언일수도, 무용담이라면 무용담이랄수도 있는 이야기를 들은것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유일하게 현장에 있었던 김두한과 홍xx, xx의 이야기를 통해 아주 미약하게나마 한번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장충단 공원 혈투가 있었던해는 1937년이다. 그러니까 김두한이 20살되던해 겨울이었다.

1937 1210일경 김두한이 조선권투선수 5명과 혼마찌패가 관리하던 명동의 아사히비루 술집에서 일본여급들과 종업원들이 보는 앞에서 단도를 든 혼마찌 꼬봉 8명을 때려눕혔다는 사실도 모두 일치한다.

이때까지 종로와 명동은 불문율이 있었는데 서로간에 나와바리는 절대 들어오지않는다는 불가침 조약이었다.

하지만 명동을 꼭 구경하고 싶다는 권투선수들의 성화에 못이겨 김두한이 이들을 데리고 명동바닥에 들어선것이 화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극장경영권과 화신백화점 문제로 서로 으르렁거리던 사이였는데 상대 오야붕이 운동좀 했을법한 사람들까지 데려와 명동 한복판에서 거나하게 삐루를 마셔대자 혼마찌 술집기도들은 배알이 꼴리기 시작했고 가차없이 덤벼들었던것이다.

헌데 덩치에 어울리지않게 어찌나 몸이 빠르던지 이 8명은 김두한이 휘두르는 주먹과 발에 흠씬 두들겨맞고 술집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신고를 받은 일본 순사들이 현장에 투입되어 종로패를 조사한 뒤 해산시켰고 야심한 밤이라 몇 안되는 혼마찌 졸개들은 종로일행들이 거나하게 술을 걸친체 청계천을 건너는 모습을 그저 멀뚱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다음날 터졌다. 김두한이 운동선수들과 새벽시간 명동한복판에서 술을먹고 기도들 아구창을 돌려버렸단 말을 들은 고노에(하야시의 장인)는 대노했다.

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고노에는 일본야쿠자의 창시자인 도루야마 마쓰히로의 부두목이었다. 일본의 여러 사무라이조직들을 박살내고 통합된 야쿠자를 탄생시키는데 돌격대장을 하면서 가장많은 일조를 한것이 고노에였다. 오죽하면 아직도 '비가오지 않는 날은 있어도 고노에가 피를뿌리지않는 날은없다'라는 말이 일본에서도 통용되고있을까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생활하던 하야시(선우영빈)는 이 야쿠자의 직계조직인 '시미즈 구미'에서 활동하게 되고 비범함이나 능력이 남달랐던 하야시는 즉각 고노에의 눈에 띄었으며 고노에의 딸과 결혼, 그의 사위가된다.

아마 비범한 만큼 처세술역시 뛰어났던 하야시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건설계통의 직업에 종사했던 하야시는 야쿠자들의 도움없이는 진전이 없다는것을 알고 스스로 '시미즈 구미'의 일원이 되기를 자청하였다(시미즈 구미에 가입하기 위해 스스로 검술까지 연마했다고 한다)

그후 하야시의 사업은 승승장구하였고 마침내 조선경영이라는 원대한 꿈을 안고 사업을 위해 사무라이들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명동에 터를 잡았던것이다.

헌데 하필 일이터진 날이 재수없게도 고노에가 딸을 보기위해 조선에 들어왔을떄였다

 

당시 16살의 나이로 종로통에서 망지기 역할을 했던 고xx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하야시는 조선인이었다. 총독부에서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거물급이라는 소문은 종로뿐만 아니라 한성바닥에 이미 짜하게 퍼져있는 상황이었다. 건설사업뿐만 아니라 도박사업도 꽤나 즐겨했는데 가끔 일이 있어서 종로통에 들어올때가 있었다. 그럴때마다 가끔씩 김두한과는 술도한잔 하는 사이였다. 돈이 많았는지 (김두한)밑에 동생들과 꼬봉들까지 다 불러다가 모아놓고 (술을)사고 술값을 내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그때 삼수(김삼수)똘마니로 있었는데 삼수가 저분은 총독부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 조선사람 출신으로 출세했다. 등등의 이야기를 해줬다.

가끔은 김두한이 어깨들을 데리고 명동으로 건너가 술자리를 갖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도 그 비싼 술값을 하야시가 다 냈다고 들었다. 사람이 아주 젠틀하고 예의 바른대다가 종로통 주먹들을 보면 항상 불러다가 국밥도 사주곤했다. 김두한과 친분이 있는사이이니 우리도 형님처럼 대우해줬고 일본어깨들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 청계천은 큰형님들(김두한,하야시)들이 약속된 자리가 아니면 함부로 넘지않았다.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129일이었다. 왜냐하면 128일이 이철수라고 레슬링하던 친구 생일이었다. 내 친형님과 동갑인데 각별한 사이였고 나와도 친했다. 서로 생일은 항상 챙겨주었다.

그날 친형님과 삼수형,철수형 해서 몇 명이서 늦게까지 술을먹고 잤던 생각이 난다. 오전에 10시쯤 일어나 국밥먹으러 가려는데 동생들이 튀어와서 다 우미관으로 모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는거다.

무슨일인가 하고 우미관으로 달려갔더니 종로통 식구들뿐만아니라 서대문,시구문,서울역등 한성바닥에 어깨들이 싹다 소집되어 있었다.

어제 김두한이가 일본어깨들 몇 명 때려눕혔는데 하야시에게 사과를 하려 가려해도 고노에가 가만히 있겠냐 이거야. 고노에라 하면 일본 사무라이중에 최고거든 일본어깨들이나 하야시에게서 귀에 못이박히도록 들었으니까. 근데 지금 고노에가 조선바닥에 와있다 이거야. 고노에라면 일본깡패두목인데 부하들이 조선주먹들한테 줘터졌으니 아마 한판 붙으려 할거다 그러더라고 고노에가 충무로에 들어오고부터 뭔가 분위기가 좀 심상치 않기는 했어. 종로하고 명동 주먹들이 부딫히는일이 많았지. 고노에가 조선놈들하고는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얘기하고 다녔다 이거야. 그러니까 이왕 이렇게 된거 일본놈들이랑 한판 붙자이거지

 

종로회관 옆에는 혼마찌가 운영하는 캬바레가 있었다. 그날 종로패 수십명은 캬바레를 급습했다. 혼마찌가 운영하는 캬바레는 밤에는 캬바레로 운영되었지만 낮에는 마작을 하는 도박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종로패가 캬바레를 덮쳐 순식간에 기도들을 때려 눕히고 캬바레안으로 쳐들어가자 책임자였던 일본의 가라대선수 출신 이치마는 한판붙을 듯이 으름장을 놓다가 종로패 주먹들이 바짝 태워버릴듯한 분위기를 보이자 부하들을 데리고 명동으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김두한은 이치마에게 저녁에 충무로로 갈테니 청계천에서 한판 붙자고 선전포고를 했다.

내용은 노변야화에서 김두한이 말한대로 단도까지는 괜찮지만 비겁하게 낫폰도는 들고 나오지말라고 경고했다.

 

고노에는 당장 하야시에게 불호령을 내리며 김두한의 종로패 도전을 받아들였다. 김두한에게 사람들 보내 시간은 익일(1210)오전6시로 하고 장소는 장충단 공원으로 정했다. 김두한도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종로패와 혼마찌가 한판 붙을거라는 소문은 저녁이 되기 전에 찌라시들에 의해 벌써 짜하게 퍼졌다.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장충단 싸움에 대해 얘기했다. 나가서 구경하겠다는사람, 누가 이겼으면 좋겠다는 사람등 의견도 가지각색이었다.

 

여기서 잠깐 홍xx의 말을 들어보자

수원에 있던 홍xx와 김두한이 처음 만난 것은 반도의용청년단 문제로 1942년 홍xx가 종로에 들어와서였다.

[ “나하고 닷또상(신영균)은 그때 수원에서 일(주먹생활)을해서 경성쪽일은 그냥 소문으로만 듣고있었지. 지금 생각하면 그때 종로랑 친하게 지내지 않았던 것이 후회돼. 진작에 알았으면 우리도 한판 같이 붙는건데 말이야. 내가 1942년에 청년단 문제로 종로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종로애들이 자기들을 과시하려그랬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는데 둘,셋만 모이면 우리들으라는 식으로 장충단 공원 얘기를해. 우리 기좀 죽이려는거지. 그때 하도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아예 외울정도였다니깐.... 아마도 붙기로한날 소문이 하도 퍼져서 이제 순사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야. 그때 당시에 고노에,하야시라 하면 그사람들은 저 윗사람들이랑 노는 사람들인데 고등계,사법계 순사들은 어떻게든 그놈들한테 잘보이려고 아주 난리가 아니었거든. 자기들 나름대로 생각한게 종로주먹들을 싹 잡아버리자였지. 몇 명만 남겨놓고 싹 잡아버리면 싸움에서 질것아니요? 전날 아마 경성의 주먹패들이 다 모여서 술을 마신모양이야. 취한애들이 거리로 나와서 소리질러대고 좀 거슬리게 했었나보지. 순사가 지나가다가 시비를 거는거야 왜 이렇게 시끄럽게 떠드냐 이런식으로 말이지. 그러니까 감정이 서로 들어가게되니까 종로애들이 순사들을 친거야. 이때다 싶은거지 골목골목 대기하고있던 종로경찰서 순사들이 다 튀어나와서 몽둥이로 두드리면서 주먹들을 다 서로 끌고가버린거야. 감히 순사들을 팼어? 너네 한번 당해봐라 이거였지. 그때 종로회관,비너스 술집,시장통에 있던애들은 모조리 순사들한테 얻어맞고 서로 끌려갔어. 관철여관으로 들어가려던 애들까지 잡아서 개패듯이 패고 다 끌고갔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관철여관에서 잠들어있던 몇 명 빼고는 싹다 잡혀들어간거야. 그러니까 새벽에 일어난 관철여관 주먹들은 어떻겠어? 황당한거지. 아니 여관에 지들밖에 없거든.....”]

 

혹자들은 말들이 많았다. 혼마찌와 대결은 벌인 것은 종로패 3명이다, 5명이다, 4명이다 등등..... 하지만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본다면 장충단으로 향한 종로주먹들은 딱 6명이다.

김두한,문영철,김무옥,김삼수,정진영,와싱턴 이렇게 6명이었다고 기억한다. 정진영은 부산에 있다가 대결시간 몇시간전에 도착하는 바람에 다행히 화를 면할수 있었다.

당시 일본 야쿠자들은 키가작아 평균 165정도였다고 한다. 아무리 여건이 좋지 않았지만 덩치나 싸움 스펙으로 보면 6명이 가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종로패는 혼마찌에 별다른 통보없이 그냥 싸움장소로 향했다. 신발은 권투화를 신고 손에는 붕대를 감고 쇠파이프를 든체였다.

 

장충단에는 혼마찌패 50여명이 사열하고 있었다. 고노에는 종로패 숫자가 턱없이 적자 적지않게 당황했다고 한다. 소문에는 경성에 있는 주먹패 200여명이 나올것이라 하여 쪽수로는 턱없이 불리해 바짝 긴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딸랑 6명이 걸어오자 혹시 매복을 시켜놓은게 아닌지 주위를 샅샅이 뒤졌다고 한다.

김두한이 고노에에게 6명이 나온 이유를 설명하였으나 대결을 미룰 의사는 없다고 전했다.

마치 악마와 같이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야쿠자 고노에 였지만 무사도를 신봉하는 진정한 사무라이는 자신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었던 고노에는 혼마찌패들을 6줄로 세웠다.

6:6으로 대결을 하려는 심산에서였다. 맨 첫줄이 단도를 들고 달려들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통이 깨지고 얼굴에 피를 흘린체 조용히 잠들어 버렸다. 계속해서 두 번째줄 6명이 달려들었다. 잠시 접전이 펼쳐졌으나 이 6명도 종로패에게 박살이 나고 말았다.

이런식으로 종로패는 6인이 한조가된 혼마찌패 8줄을 개패듯이 두들기며 끝장냈다. 단도가 춤을추고 쇠파이프가 허공을 가르는 살벌한 전투였지만 정작 활극은 30여분밖에 되지 않았다.

종로패가 혼마찌 6명을 아작 낼 때마다 고노에는 김두한 일행이 충분히 쉴 시간을 주었다.

부하들이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을 본 고노에와 하야시는 경악했다. 놀람과 동시에 자신들의 실력이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현실에 우울해지기도 하였다.

혼마찌 최고의 강펀치라는 이치마가 닛폰도를 뽑아들고 뛰쳐나가자 고노에가 호통을 치며 가로막았다.

종로패도 팔과 몸에 많은 찰과상을 입었다. 김삼수와 와싱턴은 옆구리에 칼을 맞기도 하였다.

하야시가 고노에를 대변해 패배를 인정했다. 오해가 생겨 사이가 틀어졌고 결국 싸움까지 벌이게 되었지만 앞으로는 오해를 풀고 형제지간으로 지내자는 의견이었다. 그 증거로 매달 천원씩 용돈을 보내겠다는 선언도 하였다. 말이 좋아 용돈이지 조공을 한다는 뜻이었다.

종로패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만약에 저들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윗선에 찌르기라도 한다면 조선주먹패는 만신창이가 되고 말 것이다.

헌데 예상과는 다르게 순순히 항복을 하고 나오자 김두한도 하야시에게 형님이라는 존칭을 붙여주어 최소한의 자존심만은 살려주는 선에서 마무리하였다

이것이 미약하게나마 살펴본 장충단 공원 혈투의 재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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